[역경의 열매] 유현종 (12) 입주 가정교사 시작… 가난 한숨 돌려

[역경의 열매] 유현종 (12) 입주 가정교사 시작… 가난 한숨 돌려 기사의 사진

그래도 1년쯤 가난에서 벗어나 숨을 돌리게 된 것은 장충동에 있던 동석이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을 때였다. 당시 가정교사란 아무나 차지할 수 없는 아르바이트 중의 노른자위였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한 일류대생에게나 자격이 주어지지 나 같은 삼류대생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대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가정교사 맡은 지 일 년 만에 두 손을 들었다. 공부는 뒷전이고 말썽만 피우는 아이를 감당하지 못해 성적을 올려놓겠다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통사정했다. 그 자리에 날 소개해달라고. 내가 맡으면 6개월 내에 그 녀석 버릇을 고쳐놓고 성적까지 확실히 올려놓겠다고 장담했다.

친구는 비웃었다. 자기 같은 일류대 수재도 두 손 든 아이인데 경험이 전무한 삼류대생이 맡아 어찌하겠느냐는 거였다. 그러면서 말도 못 꺼내게 했다. 하도 조르니까 친구는 마지못해 6개월 한시적 가정교사로 소개해줘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초등학교 5학년인 동석이는 그야말로 공부는 죽어도 하기 싫어하는 천방지축이었다. 제멋대로여서 부모도 어찌할 수 없는 말썽꾸러기였다. 6개월로 약속했지만 처음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동석이 부모님은 방산시장에서 포목상을 하고 있어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성질부터 고쳐놔야겠다고 생각해 나는 마침 장충단공원 안에 누군가 매달아 놓은 낡은 샌드백이 있는 걸 보고 새벽부터 동석이를 깨운 뒤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권투를 가르쳤다. 권투를 한다고 하니 동석이는 고분고분 따랐다. 성질 고치는 데 권투만한 게 없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한달쯤 지나자 내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점차 공부시간을 늘려나갔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반에서 꼴지 하던 아이인 탓에 기초가 너무 부족해 공부 진도를 제대로 나갈 수 없었다. 나는 하지만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시간에 맞춰 동석이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차 한 잔을 시켜놓고 다짜고짜 매달렸다. “이번 일제고사에서 동석이 석차를 꼴찌에서 5등만 올려주세요.”

“누구 감옥 가는 거 보고 싶어요. 당신, 경찰에 신고해야겠구먼.” 선생님은 펄쩍 뛰었다.

나는 삼류대생이 어렵게 얻은 교사자리인데 6개월 내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노숙자 신세가 될 거라며 통사정했다. “부정한 방법이란 거 압니다. 하지만 외상거래라고 생각해 주세요. 외상으로 석차 올려주시고 다음에 올린 만큼 성적이 안 나오면 다시 꼴찌로 원위치해주시면 되잖습니까?”

결국 선생님은 날 믿고 원하는 대로 해주셨다. 동석이 부모님은 아들 성적이 개구리 뛰듯 올랐다면서 집안잔치를 하고 나에게는 양복 한 벌을 해주셨다. 6개월이 아니라 계속 있어달라고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동석이를 가르쳤다. 선생님이 일단 올린 성적에서 떨어지면 나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동석이 성적은 떨어지지 않고 서서히 올라갔다. 동석이 담임은 나를 불러 저녁식사를 사주고 격려까지 해주셨다.

나는 인성을 고치지 못하면 그나마 재미를 붙인 공부를 언젠가는 집어치우고 원래대로 될지 몰라 동석이를 데리고 교회까지 출석했다. 지금 동석이는 모 은행의 잠실지점장으로 퇴직했고 안수집사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동석이 과외선생을 1년밖에 하지 못했다. 군대 입영 영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해 나에게는 또 다른 기쁜 일이 있었다. ‘자유문학’이란 문학잡지에 신인으로 당선돼 문단에 등단한 것. 이젠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난한 10년의 무명작가 시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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