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수민 (1) 인생 최고의 전성기에 시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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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당시 37세이던 내 삶은 최고 전성기였다. 고려대에서 화학전공으로 이학박사(Ph.D) 학위를 받은 후 한남대 조교수로 승진하며 학과장이 됐다. 또 내 논문이 미국 고분자분야 학술지인 ‘마크로몰레클스’에 게재돼 세계적인 화학자가 되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가정적으로는 교사인 아내(김군자)와 두 아들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고 2년 전 35세라는 나이로 대전 태평성결교회에서 최연소 장로 장립을 받았다. 교회 봉사와 선교에 열심이었던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 여기고 감사하며 새벽제단을 쌓고 있었다.

1981년 정부는 박사학위를 소지한 젊은 과학도 10명을 선발, 1년간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대학에 파견하여 연구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에 내가 최종 선발됐다. 아내와 아이 둘까지 미국비자를 신청하며 우리 가족은 멋진 미국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미국행을 준비하던 82년 5월 23일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흐르고 안구가 뻣뻣해지는 증상이 느껴졌다. 무리를 한 탓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증세는 더 심해졌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시력이 갑자기 나빠져 안경을 착용해오던 나였다. 심한 근시였지만 그동안 수많은 화학실험을 하는 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대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안과병원을 아내와 함께 찾았다. 정밀검사를 하는데 의사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이어졌지만 애써 태연하려 노력했다.

“녹내장 말기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계셨죠?”

“선생님, 녹내장은 수술로 쉽게 고치는 병이죠. 나을 수 있는 것이죠?”

나의 되물음에 의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의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기 증상이라 수술을 해도 의학적으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나는 너무 놀라 동시에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실명할 수 있다구요?”

나는 너무나 충격이 커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간신히 추슬렀다. 아내와 나는 극한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는 대학교수로 강단에 서지 못하고 미국행도 좌절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유명하다는 한의사를 찾았다. 그는 녹내장에 좋다는 진서각(코뿔소의 뿔)을 처방해 주었고 2달간 열심히 달여 먹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안과로 유명하다는 서울의 모 대학병원을 다시 찾았지만 그곳의 진단도 나를 절망시켰다.

“이 박사님. 안압이 너무 높아요. 21이나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눈을 방치하셨나요?”

의사의 목소리는 질책에 가까웠다. 국내 의료기술로는 수술해도 치료가 힘들다고 대전의 의사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미국에 가면 고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미국이야 의술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이니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 미국으로 가서 고쳐보자.”

아내와 나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정말 간절하고 뜨겁게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실명하지 않을 것으로 확실히 믿었다. 지금 이 시간은 주님이 우리를 위한 연단의 과정일 뿐이라고 여겼다.

8월에 미국 비자가 나와 우리 가족은 예정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은 눈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니 국비연구생 일정을 그대로 소화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신나서 야단이었지만 우리 부부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약력=1945년 충남 예산 출생, 한남대 및 고려대 대학원(이학박사) 졸업, 한남대 이과대학장 및 생명나노과학대 학장 역임, 영국 케임브리지 IBC에 탁월한 과학자로 등재,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태평성결교회 장로, 한남장학회 이사장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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