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36) 밉지 않은 청탁의 달인 기사의 사진

청화백자로 만든 잔 받침이다. 바닥에 그림이나 무늬 대신 글씨가 씌어 있다. 가는 붓으로 쓴 해서체는 반듯하다. 다섯 자와 두 자씩 돌아가며 쓰였는데, 마주 보는 대칭형이 간동한 디자인이다. 읽어보니 칠언절구다. 무슨 까닭으로 잔 받침에 썼을까.

시는 조선 중기 문인 이명한이 지었다. 아버지와 아들까지 삼대에 걸쳐 대제학에 오른 그는 궁중 그릇을 만드는 사옹원 관리에게 이 시를 보냈다. 내용인즉 자기 술잔을 보내라는 건데, 윽박지르지 않고 에둘러 드러낸 속내가 참으로 은근하다. ‘표주박 잔은 소박하고 옥 술잔은 사치스러워/ 눈꽃보다 나은 자기 술잔을 사랑한다네/ 땅이 풀리는 봄이 오니 왠지 목이 말라/ 잠시 꽃 아래서 유하주나 마실까 하네’.

이명한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사옹원은 이조에 딸린 관청이다. 이 시의 수신인은 종8품 봉사였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요청하되 위세 부리는 명령조는 눈곱만큼도 없다. 물리치기 힘든 고수의 풍류가 도리어 곰살궂을 정도다. 유하주(流霞酒)는 ‘흐르는 노을’이란 이름대로 신선이 마시는 불로주다. 이 술에 취한 선녀가 비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옥잠화가 피었고, 당나라 시인들은 가는 청춘이 아쉬워, 지는 봄꽃이 그리워 마셨다.

봄날의 갈증을 씻어줄 술잔 하나 부탁한단다. 이 반죽 좋은 핑계에 누군들 손사래 칠까. 기꺼이 갖다 바치길 태깔 곱게 구운 잔과 잔 받침 한 벌이었을 터. 이명한이 아끼던 술잔은 사라지고 잔 받침이 남아 높은 자리 꿰찬 이들에게 들려준다. “청탁은 너절하지 않게, 듣는 이를 미소 짓게 하라.”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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