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가을맞이 나선 배롱나무 기사의 사진

배롱나무 꽃이 무더기로 떨어졌다. 사납게 몰아친 바람 탓이 크지만 태풍 아니었어도 떨어질 참이었다. 농염한 붉은빛 꽃으로 무덥고 지루했던 많은 날들의 피로를 씻어주며 여름내 우리 산과 들을 물들였던 여름 꽃이다.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해 남부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이지만, 따뜻해진 최근의 기후라면 수도권 부근의 중부에서도 충분히 키울 수 있다. 배롱나무는 꽃도 좋지만,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옆으로 넓게 퍼지는 수형이 아름다워 계절과 무관하게 정원수로 사랑받는 나무다.

여름이 시작되는 7월부터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해서 백일홍나무라고 부르다가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배기롱나무가 됐다가 배롱나무라는 예쁜 이름으로 바뀌었다. 멕시코가 고향인, 국화과의 초본식물인 백일홍과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식물이다. 목백일홍, 나무백일홍이라고 부르는 것도 초본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물론 하나의 꽃송이가 백일 동안 피어있는 것은 아니다. 가지 끝에서 고깔 모양으로 모여서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꽃차례에는 매우 많은 꽃봉오리가 돋아나서, 하나의 꽃이 피었다 지면 곁에서 다른 꽃송이가 피어나면서 여름의 불볕 햇살에 맞서 정열을 쏟아낸다.

새빨간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꽃은 주름투성이로 된 여섯 장의 꽃잎으로 피어난다. 꽃잎의 붉은색 가운데에는 노란색의 꽃밥을 단 수술이 30∼40개 돋아나는데, 그중 가장자리의 6개가 유난히 길다.

대개의 배롱나무 꽃은 진한 분홍색으로 피어나지만 생육 조건에 따라서 연한 분홍색에서부터 짙은 자주색까지 다양한 빛깔이 있다. 드물게 흰색으로 피어나는 배롱나무도 있는데, 이는 따로 흰배롱나무라고 나누어 부른다.

여인의 말간 피부처럼 매끈한 나무줄기 표면도 배롱나무의 중요한 특징이다. 잎 떨어진 겨울에도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이유다. 연하게 붉은색이 도는 갈색 바탕에 얼룩무늬가 곱게 번져나는 줄기 표면은 매끄럽다. 마치 간지럼을 참기 힘든 얇은 피부처럼 여려 보인다. 충청도 일부 지방에서 ‘간지럼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나 제주도에서 부르는 ‘저금하는 낭’이라는 이름 역시 이 같은 줄기의 특징에 기댄 것이다. 일본에서도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부른다.

잔인했지만 배롱나무 붉은 꽃이 있어 행복할 수 있었던 여름은 찬란한 핏빛 낙화와 함께 서서히 저물어간다. 태풍이 다시 올라와도 지금은 가을을 준비할 시간이다.

천리포수목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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