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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커버 스토리] 아르세니아씨 행복하세요?

[이웃-커버 스토리] 아르세니아씨 행복하세요? 기사의 사진

[미션라이프] 새만금방조제 준공이 올 봄이라 차량 내비게이션은 군산과 연결된 신시도를 찾지 못했다. 그곳 선착장에서 기다리는 박병근(53·군산 신시도교회 집사)씨와 가까스로 통화가 됐다. “아따 자꾸 집사람한테 전활 혀면 워쩌요. 나한테 해야지. 긍게 새만금방조제로 건너와서 신시도 선착장으로 오면 차 대는 데가 있어요. 거서 기다리고 있응게.” 투박한 말씨였다.

이리저리 달려 목적지에 다다랐다. 검게 그은 얼굴에 뱃사람 특유의 매무새,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는 박씨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야마하 엔진을 단 작은 어선(양식장 관리선)을 그는 ‘모타뽀트’라고 불렀다. 탈탈거리는 배에 오르니 군산 앞바다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도착한 신시도. 고군산군도의 24개 가운데 가장 큰 섬이다. 주민은 400여명. 삼삼오오 모여앉아 그물에 걸린 꽃게를 빼내느라 분주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해 꼬박 5시간이 걸렸다. 출출했다. 반갑게도 한 상 차려진 음식들. 수라상이 따로 없었다. 갓 잡은 꽃게로 만든 무침이며 광어회, 갖은 반찬···. 꽃게탕은 그중에서도 일품이었다. 마침맞은 국물에 자작하게 졸여진 꽃게는 입안에서 바스라졌다.

“이건 단호박이네요?”

“네. 단호박을 넣으니 훨씬 맛있더라고요.”

자꾸만 손이 갔다. 민박집 안주인 김아르세니아(40·본명 아르세니아 비 응아세우) 집사의 솜씨다.

아르세니아씨는 올해로 15년차 주부다. 1994년 필리핀에 선교 차 방문한 박씨를 만나 2년여간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던 것이 그만 부부의 연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신시도는 낙도였다. 아르세니아씨는 이따금씩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삐딱하게 서 있거나, 한 발을 다른 발 위에 얹거나, 한 손으로 허리를 지탱하고 서 있거나 했다. 며느리라면 누구나 주방에서 취해봤을 포즈. 일상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힘들죠. 힘들어서 내가 이러는데, 자꾸 뭐를 하라 그러니깐(웃음).”

아르세니아씨는 타박하듯 신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삼시 세 끼 한 상 차려내기란 쉽지 않을 일. 주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외식’이라고 하질 않던가.

“뭐. 그려도 당신 요사이는 애들 필리핀에 가 있어서 외식도 자주 허고 그러잖여.”

두 딸 은혜(14), 지혜(12)는 어학연수 차 필리핀에서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세니아씨는 남편의 말에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아르세니아씨의 하루는 이렇다. 새벽 5시30분 기상. 아침밥 짓기. 밭에서 채소 캐기. 꽃게 잡으러 나가기. 꽃게 팔기. 점심 식사 준비. 꽃게 잡으러 나가기. 꽃게 손질하기. 저녁 식사 준비. 집안일. 밤 11시 취침.

이 밖에 매주 월요일엔 신시도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영어교사로 3시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매주 금요일 저녁엔 신시도교회 구역장으로 모임 준비도 한다. 주말엔 민박 손님들이 몰려와 일이 갑절로 늘어난다.

“필리핀에서 와서 고생한다 그러겠어요(웃음).”

그녀는 필리핀에서 나름 ‘엄친딸’이었다. 바기오 만까얀에서 ‘응아세우’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알아줬다. 일곱째인 그녀를 포함한 11남매 모두 대학을 나왔다. 지역 군수나 시의원 중엔 그 집안 사람이 꼭 한둘은 들어갔다. 목사인 둘째 오빠는 불의의 사고로 선교 도중 숨졌지만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를 정도로 교계에선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그녀 역시 월급이 5000페소(95년 당시 15만원선)인 자유수출공단에 다녀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뒤웅박 팔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박씨에게 시집가면서 온실 속 화초는 질긴 들풀이 됐다.

“시집을 안 보낼라 하더라고요. 나이차도 많이 나고, 집사람은 배웠지만 나는 못 배운 사람잉게. 그려도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허거든요. 그건 집사람도 알아.”

응아세우 집안은 박씨를 사윗감으로 반대했고 아르세니아씨도 머뭇거렸다. 박씨는 94년 르와칸 마을 교회를 건축하는 데 도움을 주러 간 신시도교회 성도였다. 한 번 보고 잊혀지지 않아 교회 건축을 핑계로 툭하면 필리핀을 찾았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박씨는 독학으로 영어를 깨치는 투혼도 발휘했다.

“그때는 ‘농촌총각 울리는 도시처녀’ 이런 제목의 뉴스가 여기저기서 나왔어요. 나이가 차도 이상허게 만나고 싶지가 않더라고. 근데 우리 집사람을 보니까 참 순수허고 착허고.”

순박한 어촌 총각의 끈질긴 구애는 아르세니아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신앙이 참 좋더라고요. 가족들도 나중엔 다들 좋아하고.”

응아세우 집안은 가톨릭 국가 필리핀에서는 드문 대대손손 기독교 집안이었다. 박씨네도 기독교인이 많았다. 박씨는 문중 제사 때 장손임에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됐다. 신앙은 유일한 공통 분모였다. 둘은 르와칸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96년. 한국에 시집 온 첫 해 은혜가 들어섰다.

“첨엔 엄청 울었어요.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르고. 필리핀은 남자가 집안일 도와주는데 여긴 다 여자가 해야 하잖아요. 시누들 있어도 그냥 다 해야 하니까. 그거가 제일 힘들고.”

3남3녀의 장손 며느리. 힘든 자리였다. 생활고도 심했다. 남산만한 배를 잡고 고깃배에서 간신히 서 있던 일, 추운 겨울 만삭의 몸으로 포장마차에서 어묵 팔던 일은 돌이키면 서러워진다.

IMF도 겪었다. 그 해 하필 둘째가 생겨 필리핀에 있는 남동생까지 불러들였다. 98년 둘째 지혜를 낳았다. 남동생은 이듬해까지 아르세니아씨 대신 남편 일을 도왔다. 동생이 떠난 자리는 그녀가 메워야 했다. 네 살 딸에게 두 살 된 꼬맹이를 맡기고 일터로 나갈 때의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둘이 어장 해야 하잖아요. 새벽 2시나 3시에 나가서 집에 들어오면 오전 10시나 11시예요. 그럼 애들은 챙겨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내가 밥을 해놓고 나가면 둘이가 알아서 퍼서 먹는.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바다와 씨름한 세월은 곱던 얼굴에 검버섯과 기미를 남겼다.

두 딸은 밝고 씩씩하게 자라줬다.

큰딸 은혜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군산 시내 서해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교생이라곤 20명뿐인 섬학교에서 한 반에만 38명, 전교생이 400여명에 이르는 학교로 옮겨간 아이. 은혜는 들떴으나 부모는 걱정이 앞섰다. “학교 선생님이 먼저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라는 얘길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혹시나 애가 놀림 받을까봐.”

은혜는 부모 속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엄마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엄마는 필리핀 사람인데 TV에도 여러 번 나오셨어!” 2002년 3월 국민일보에 소개된 것을 시작으로 KBS ‘인간극장’ 등에서 그녀의 사연을 전한 터였다. 친구들은 오히려 은혜를 부러워했다.

은혜는 공부도 잘했다. 6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점수는 98점, 등수는 전교 2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 날엔가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물어요. 그래서 검사가 되서 억울헌 사람 편도 들어주고 또 잘못한 사람은 벌도 주고 그랬으면 좋았을 거 같다고 혔어요. 그때부터 이눔이 검사한다고.” 역시 동기부여만한 교육이 없나보다.

둘째 딸 지혜는 운동을 잘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장배 수영대회에 나가서 금메달 은메달을 따왔다. 지혜는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공부를 권했다. 그 뒤로 학업성적이 부진했던 지혜. 아빠는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혜는 하지만 힘을 내고 있다. 올해 성적은 평균 94점. 아빠는 95점을 맞으면 휴대전화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성적이 대수겠는가. 어장일 한다고 자식 둘을 시내에 따로 떼어놓고 살아야 하는 부모 마음에선 그저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원비도 한 달에 100만원씩 들어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특공무술도 가르쳤다.

아이들이 커가듯이 살림도 불어났다.

단층집은 2층 민박집으로 바뀌었고, 작은 배는 16인승 낚싯배에서 22인승 낚시어선으로 교체됐다. 아이들을 위해 군산시내에 아파트 한 채도 장만했다.

“부자는 아녀요. 전 재산 탈탈 털어도 서울에 있는 집 한 채 사겄어요? 하지만 애덜 교육비허고, 생활하는 데는 큰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혀요. 첨에 비하면 수입이 다섯 배는 늘었죠.”

방조제 사업을 지켜보면서 패키지 관광 상품을 만든 게 주효했다.

박씨는 이장(2003~2006년)도 지냈다. 전망대를 만들고 마을회관도 새로 짓는 등의 공로로 표창장도 숱하게 받았다. 내년에 또 이장직에 도전해 미니 해수욕장을 만들겠다는 박씨다.

아르세니아씨는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지난해 11월 상영된 영화 ‘달려라 차은’에서 여주인공 차은의 엄마 역할이었다. ‘달려라 차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인권영화 ‘시선 1318’ 시리즈 중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중편영화다.

“어장일도 민박도 못해 손해가 컸죠. 그래도 재밌긴 했어요.”

노는 두 달은 출연료 70만원으로 먹고 살았다.

최근에도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역할이라 거절했어요.”

유명세를 타면 탈수록 전국 각지의 이주 여성들은 그녀를 찾았다. 한국인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울먹이는 목소리, 시부모에게 온갖 욕을 다 듣고 설움을 토해내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한번은 너무 화가 나서 집까지 찾아갔어요. 가서 남편한테 왜 때리느냐고 따졌죠. 지금은 애 셋 낳고 잘 살고 있대요.”

결혼알선업체를 통해 결혼한 경우는 남편들의 인식이 문제였다. “돈 주고 사 왔는데 왜 내 맘대로 못하냐 그런 생각을 하더라고요.” 요즘은 현지에서도 알선업체의 소개는 기피하는 분위기랬다.

출산과 양육, 자녀교육 등도 이주여성들에겐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산후 조리기간 친정 식구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도 없고, 한창 말을 배울 자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엄마들. 아르세니아 그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큰 시련도 있었다.

2007년 1월. 아르세니아씨의 목에 혹이 보였다. 물을 삼켜도 바로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30일간 원광대 병원에 입원했고, 설 지나 수술대에 올랐다. 간단한 수술이라더니 7시간이 걸렸다. 떼어낸 덩어리는 서울로 보내졌다. 검사결과는 악성종양이었다. 갑상선암이었던 것이다.

흔히들 갑상선 질환을 ‘공주병’이라고 한다. 힘든 일 해선 안 되고 잘 먹고 잘 쉬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섬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섬에서 뭐하냐고, 나가서 영어나 가르치지, 그렇게들 말해요.”

아르세니아씨의 장래희망은 선생님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 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정식 교사로 강단에 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학교가 아니면 학원이라도 하고 싶죠.”

남편의 꿈은 다르다. “지금 허고 있는 일을 관두고 새로운 일을 헌다는 건 말이 안 되고요. 저는 다른 거 없어요.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허고 나면 일 그만 헐 거예요. 그때 가면 집사람 손 붙들고 여행 다니고 싶어요.”

여느 부부처럼 티격태격하는 부부. 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은 깊었다.

“힘들어하는 모습 보면 참 미안허고 그러죠.”

“애 아빠가 그래도 참 많이 도와줘요.”

남편은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비수기인 겨울이면 아내의 친정에서 한 달 이상 가족과 함께 머물고, 아내는 장손인 남편을 위해 집안 행사를 꼼꼼히 챙기고 귀한 고기라도 잡히면 어르신들에게 먼저 가져다드린다고 했다.

국경도 나이차도 극복한 부부는 이제 서로 닮은꼴이다. 누가 한국 사람인지 필리핀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박씨는 오늘도 그물을 바다에 드리우고, 아내는 오늘도 꽃게를 손질한다. 선착장까지 배웅해준 이들 부부는 해질녘 다시 섬으로 들어갔다.

신시도=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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