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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김용백] 날고 싶은 신발

[데스크시각-김용백] 날고 싶은 신발 기사의 사진

전쟁과 그 후유증은 처참하다. 만행(蠻行)으로 인해 인간 존엄성이 파괴되고 만다. 그 고통 대부분을 나약한 무지렁이 인민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전쟁은 그래서 인류의 가장 저주받을 행위로 규정되고도 남는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이달 초 시위대로부터 신발 세례를 받았다. 총리 재임 때 ‘부시의 푸들’로 폄하되면서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주도했던 데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블레어는 최근 출판한 자신의 회고록에 이라크 전쟁은 불가피했으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신발은 달걀 등과 함께 상징적으로 던져졌다. 그의 출판 기념행사는 취소되곤 한다.

부시도 같은 이유로 임기 말에 두 번이나 ‘신발 맛’을 봐야 했다.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했던 미·영 당시 최고 지도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인류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팽팽하다. 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발을 피해 다녀야 하는 굴욕은 한참 지속될 것 같다.

신발 투척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모욕’을 주는 상징적 행위다. 신발 바닥의 비위생에 대한 공감은 굳이 표현할 것도 없다. 2008년 12월 이라크에서 신발 세례를 받은 부시 이후 신발에 노출된 국가원수급 인사만 7명에 이른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 등등이 당했다. 비인간적, 비도덕적, 모순적 결정이나 언동의 대가인 셈이다. 부끄럼의 자각과 그릇된 행위의 반성을 촉구하는 지구촌의 상징적 퍼포먼스가 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Shame on you)”는 쟁쟁한 외침 속에서 말이다.

지난달 어느 장관 후보자는 장녀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과 그 딸이 무자격 건강보험 혜택을 누린 사실 때문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닦달당했다. 놀라운 건 되레 딸을 두둔하고 자랑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그 후보자다.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할 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정말이지 두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이젠 생각을 접었다. 왜냐면 딸 사랑이 지나친 현직 장관의 불법 행위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 장관은 딸을 자기가 수장인 외교통상부에 특채시키려고 불법 행위의 뒷배가 됐다. 딸을 두둔했던 앞의 인물이 딸을 위해 할 수도 있을 다음 단계가 노출됐으니 지켜보기를 관둘 수밖에.

한 사람은 장관이 됐고, 한 사람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명암은 엇갈렸지만 불법적, 비양심적 행위 기준 앞에서 둘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현 정권에서 정부 요직을 맡겠다는 인물들의 됨됨이가 혀를 찰 정도다. 그들의 ‘땟국’이 보통사람들만도 못해 일반인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불법 행위와 파렴치 행위를 자행한 자들이 국민세금을 봉급으로 받으면서 뭘 하겠다는 건가. 존경스러움도 권위도 없이 자리 꿰차고, 온갖 권한을 휘두르고, 권세를 누려보겠다는 것 아닌가.

우리 사회엔 부끄럼의 모뉴먼트(monument)들이 부족하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란 게 부끄럽고 지탄받을 일일 경우 가능하면 꽁꽁 덮고, 하루빨리 지워버려야 한다는 풍토로 둔갑한 탓인 듯하다. 일본 오사카 이케다(池田)초등학교는 2001년 발생한 30대 남자의 묻지마 칼부림 사건을, 미국 버지니아공대는 2007년 조승희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 비석 등을 교내에 설치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 ‘부끄러운 역사적 사실’을 붙드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함부로 지우면 쉽게 잊는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유취만년(遺臭萬年)의 계(戒)를 그려본다. 뻔뻔한 얼굴들이 다시 떠오른다. 향토적 표현을 쓰며 신발을 던지고픈 충동도 꿈틀거린다. “돼따, 마! 마이 해무따 아이가?”(그만해! 그동안 많이 해먹었잖아?)

김용백 국제부장 yb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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