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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프리마돈나 미소 되찾다… 우울증·이혼 위기 극복한 소프라노 김영미 교수

한국의 프리마돈나 미소 되찾다… 우울증·이혼 위기 극복한 소프라노 김영미 교수 기사의 사진

지난해 그녀는 55세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가장 강한 오페라 여주인공이라는 ‘노르마’를 연기했다. 여느 때처럼 무대의 중앙은 그녀의 자리였고, 환호와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프리마돈나 김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야기다. 그런데 최고의 위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그녀가 오랫동안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혼 위기를 겪었다고 하면 과연 믿을까.

최근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지난여름, 일본 아사히카와에서 열린 문화전도집회 ‘러브소나타’, 미국 서부 쪽을 순회하며 펼친 선교공연에 대한 이야기부터 쏟아냈다.

“러브소나타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1년에 몇 번씩 갔다 왔어요. 일본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목적인데, 오히려 제가 신앙의 도전을 받는답니다.”

‘동양의 마리아 칼라스’로 불리는 김 교수는 ‘그리운 강남’을 작곡한 고 안기영 선생의 외손녀이다.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홀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산타체칠리아 음악학교에 입학했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베로나·푸치니 콩쿠르 등 국제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러나 유학생활이 그리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왜소한 체구,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차별받았다. 음악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도 교수에게 레슨받기 위해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버스기사가 태워주지 않아 학교에 지각하기도 일쑤였다.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가면 늘 그녀 앞에서 ‘점심시간’이라고 푯말을 내걸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음악을 들으며 견뎌냈다.

그러다 꾹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1980년 마리아 칼라스 국제콩쿠르에서 6명에게 주는 최고상을 받긴 했지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최고의 영예를 놓쳐버렸다.

그때부터 ‘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을까?’를 수없이 되뇌며 열등감에 시달렸다. 결국 그녀는 10년간의 유학생활을 접고 8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선 냉혹한 오페라계의 현실에 좌절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국제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사랑의 묘약’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파바로티의 상대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라보엠’ ‘나비부인’ 등 본격적으로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됐지만 스폰서가 없다는 이유로 주역에서 밀리기도 했다.

게다가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남편은 FBI 요원처럼 무뚝뚝했다. 결혼한 지 8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연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아기가 안 생긴다, 살을 빼야 한다는 등 별별 이야기를 다 하더라고요. 그런 것도 자존심 상하고… 그러다 정말 기적적으로 딸 ‘조이’를 얻었지요. 정말 기뻤어요. 모든 상처를 보상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편안해지는가 싶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우울증이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인생의 가로등이었다. 성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다. 2000년 그렇게 의지하던 어머니를 잃은 뒤 그녀 역시 모든 의욕을 잃고 말았다. 잠을 이룰 수 없어 약을 먹고,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밤새 뒤척였다. 어머니처럼 기도를 해보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를 따라 꼭 죽을 것 같았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만 하나님께 부르짖어보자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채 온누리교회 목요기도회를 찾아갔지요.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으며 회개했습니다. 4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에서 자랐는데, 유학시절부터 교회를 등한시하고 주님을 잊고 산 일, 세상의 일들을 좇은 일,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일 등을 다 쏟아냈습니다.”

그때 그녀는 이사야 43장 1절 말씀을 선물로 받았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그녀는 우울증 약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말씀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몸과 마음이 점점 회복될 때쯤, 한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에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조건 가겠다고 했지요. 자선음악회에서 찬양을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고 행복감을 맛봤습니다. 그때부터 러브소나타를 비롯한 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김 교수는 어느 누가 보아도 모든 걸 다 이뤘다. 그럼에도 한 가지 꿈이 있다고 고백했다. “성악가도 나이가 들면 한계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제게는 그 한계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할 거니까요.”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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