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머리를 다친 적도 없는데 두통에 어지럽고 기억력도 가물가물… 혹시, 조기 치매? 기사의 사진

“친구와 술을 먹다가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던 중 쓰러져 잠시 의식을 잃은 경험이 있다. 나중에 의식을 회복한 뒤 들은 친구 얘기로는 당시 화장실에서 ‘쿵’하는 소리가 매우 크게 났다고 한다.”

얼마 전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서 ‘외상성 만성경막하혈종’ 제거 수술을 받은 김모(34)씨의 사연이다. 그는 술에 취해 기억조차 없는, 두부(頭部) 외상에 의한 출혈로 인해 뇌가 한쪽으로 1.2∼3㎝ 정도 밀린 상태였었다.

머리를 다친 기억도 없는데 뇌 속에 혈종(출혈에 의한 핏덩어리)이 생겨 통증으로 머리가 무거운 두중감과 함께 단기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헛소리를 해 조기 치매에 빠진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만성경막하혈종’으로 불리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젊은이 가운데는 김씨처럼 술을 많이 마시고 깬 뒤나 교통사고 또는 산업 현장에서 두부 외상을 겪은 뒤, 노인들 중에는 부딪친 기억도 없을 정도로 사소한 충격을 경험한 뒤 빠르게는 2∼3일 후, 늦게는 2∼3개월 후에야 머리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환자 수도 생각보다 많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 홍창기 교수는 “신경외과 외래 환자의 5∼10%, 두통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약 30%에게서 이 같은 병이 의심될 정도”라며 “축구 경기 중 공중 볼을 헤딩하고 난 뒤 충격을 받아 잠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부 외상에 의한 만성경막하혈종으로 일시 의식을 잃는 것은 뇌진탕 증후군과 조금 다르다. 뇌진탕은 쉽게 말해 뇌에 충격이 가해져 ‘뇌가 놀란 것’을 말한다. 즉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었지만 뇌가 손상되지 않아 금방 정상 상태로 회복되는 외상이다. 주 증상은 실신으로 두부 외상 후 일시적인 기억력 상실, 사물을 가리키거나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의 저하, 착란 상태 등이다.

반면 외상성 만성경막하혈종은 두부 외상 직후엔 출혈 흔적이 CT, MRI 등과 같은 방사선 검사 상 안 보이지만 두개골과 뇌수 사이에 위치한 경막을 잇는 실핏줄이 터져 서서히 혈종을 형성하고, 이 때문에 만성 두통과 어지러움, 기억력 상실, 의식 혼미 등을 겪게 되는 병이다.

외상성 만성경막하혈종은 또한 교통사고, 산업재해 등 안전사고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60세 이후 장·노년층에 흔하다. 나이가 들면 노화 현상으로 뇌 용적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두개골과 경막 사이가 벌어지고, 이로 인해 그 틈에 위치하던 실핏줄이 늘어나 더욱 가늘어지고, 사소한 충격에도 파열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여의도성모병원 신경외과 나형균 교수는 “특히 노인들은 뒤로 꽈당 넘어져 잠시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는 물론 머리를 부딪친 기억조차 없을 정도의 사소한 외상에도 뇌 조직이 미세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두부 외상 후 눈에 띄는 증상이 없을지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사고 직후에는 워낙 출혈량이 적어 CT나 MRI 검사를 해도 ‘이상 없음’이란 판정을 받기 쉽지만 출혈이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병원 신경외과 권정택 교수는 “외상 후 ‘경막하 출혈’이 발생한 경우 출혈이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이상 증세가 3개월이 지나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증을 예방할 목적으로 아스피린류의 항혈소판제를 복용하는 사람들은 혈액이 묽어져 출혈 시 지혈이 잘 안될 수 있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다행히 외상성 만성경막하혈종은 진단과 동시에 두개골과 경막 사이에 발생한 혈종을 제거하는 것으로 쉽게 치료된다. 다만 가급적 초기에 이 같은 처치가 이뤄져야 한다. 권 교수는 “발견이 늦어지면 삼투압 현상으로 뇌수가 스며들어 핏덩어리가 핏물처럼 묽어져 제거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뇌압 상승에 의한 뇌세포 손상이 확대돼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