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화국’에서 영어 모르고 산다는 것… 불편 떠나 생업까지 위협 기사의 사진

식당·커피숍엔 영어 메뉴·길거리 간판, 영어로 도배… 400만명 가량이 ‘까막눈’

“아이스커피 드실래요?”

“난 얼음 넣은 거 먹을게요.”

주부 조규복(이하 가명·55)씨는 중학교를 다니다 말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나마도 자주 가지 못했다. 배운 영어는 알파벳이 전부였다. 아이스커피가 얼음 넣은 커피란 건 나중에 알았다.

“학교에선 영어보다 한문을 더 열심히 가르쳤던 것 같아요.”

영어를 읽고 쓰지 못하는 조씨에게 ‘영어공화국’ 대한민국은 낯설다. 때론 두렵기도 하다. 만나기로 한 커피숍 앞에 선 채 행인에게 위치를 묻곤 했다. 돌아오는 야릇한 눈빛. 그걸 이겨낼 용기를 내야만 초행길을 나설 수 있었다.

“내 나라에서 우리말을 읽고 쓸 줄 아는데도 영어를 못하니까,

이건 완전 눈뜬 장님”이라는 조씨의 하소연에는 억울함이 묻어났다.

영어를 읽지 못해 겪는 고충은 범인의 상상을 훌쩍 넘어선다. 사소한 장벽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해 이들을 위축시킨다. 조씨에게 백화점은 지뢰밭이다.

“상표를 읽을 수가 없어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서 헤매게 돼요.”

심리적으로 주눅 들다 보니 물건을 살 때도 자신이 없다. 괜히 주뼛거리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가능하면 백화점에 가지 않고 시장에서 옷을 사 입는다.

백화점에 대한 두려움은 공통적이었다. 지난 1일 서울 신도림 한양학원 기초영어반에서 만난 40∼60대 여성들 사이에선 백화점에 대한 원망이 넘쳤다.

“SODA라는 상표의 구두를 선물로 받았어요. 사이즈가 안 맞아서 교환하고 싶은데 매장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발음도 모르니 무슨 매장을 찾아 달라고 말을 할 수도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얼굴에 철판 깔고 구두 파는 쪽 근처에 가서, 매장 직원을 아무나 붙잡고 ‘SODA’라고 적힌 쇼핑백 보여주면서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죠.” 백화점은 반드시 혼자 간다는 김미숙(49)씨 나름의 쇼핑법이다.

“백화점에서 쿠폰북이 와요. 쿠폰을 잘라 가져가면 화장품 매장에서 샘플을 줘요. 근데 쿠폰의 브랜드 이름을 읽지 못하니까 어느 매장에서 온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정말 괴롭고 불편해요.”(최길자·52)

읽지 못하니 상표는 귀로 들어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 조규복씨는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는데 귀로 아무리 들어도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는다. 말로 듣고 눈으로 브랜드를 읽어야 기억에 남는데…. 선호하는 브랜드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갑갑하다”고 했다.

다 큰 어른이 길을 잃기도 한다. 조씨는 몇 해 전 아들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생일이라고 식사 대접을 하겠대요. ‘빕스(VIPS)’라는 식당으로 오래요. 위치를 들어보니 어딘지 알겠더라고요. 가보니 영어 간판이에요. 정확히 그 식당인지 알 수가 없어 아들에게 전화해 물어봤더니 제가 그 식당 앞에 있더군요.”

좌절감은 가슴 한켠에 응어리져 있었다. 조씨 말이 끝나자 김미숙씨가 말을 받았다.

“남산타워(현재 N서울타워)에 있는 한식당에서 약속이 있었어요. 남산타워에 갔는데 전부 영어로 돼 있어요. 엘리베이터도 영어 약어로 적혀 있어 겨우 찾았어요.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식당 이름이 모두 영어예요. 결국 식당 종업원에게 한식당이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여기예요’ 이래요. 얼마나 부끄럽던지….”

식당 메뉴가 영어로 된 경우도 많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데에는 메뉴에 한글이 안 적혀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자연스럽게 ‘어떤 걸 잘하는지 모르겠네’ 이러면서 같이 간 사람이 추천해줄 때까지 기다리죠. 뷔페식당 중엔 음식 앞에 영어 이름만 적혀 있는 경우가 있어요. 무슨 음식인지 몰라서 답답해요. 처음 보는 물건 같죠. 식당 외벽에 자기들이 파는 음식이 적혀 있는데 영어로만 씌어 있으니까 도대체 뭘 파는 식당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요.”(박춘자·62)

자녀 교육 얘기까지 나오면 가슴이 더 아프다.

“아들이 둘인데 어릴 때 학교에서 내준 영어 숙제를 물어봐요. ‘선생님한테 한 번 더 물어봐’ 그러고 말았죠.” 조씨는 “부모 학력이 높은 집 아이들이 명문대에 많이 간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고 했다.

김미숙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아이 영어 학원에 등록시키려고 학원에 갔는데 영어 선생님이 수업 내용을 설명해주시더라고요. 이걸 가르치고 저걸 가르치고 한다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그래서 알아듣는 척만 하다 나왔어요. 주변 엄마들이 ‘○○프라임학원이 좋으니 거기로 보내라’는 말도 하던데 프라임이라는 말 때문에 학원을 못 찾겠더라고요. 애들한테 ‘니들이 알아서 학원 골라가라’고 했어요.”

비문해율 1.7%의 함정

대한민국 비문해율은 1.7%다. 비문해는 ‘글을 읽고 이해함’을 뜻하는 문해의 반대말로, 부정적 의미를 띤 문맹 대신 쓰인다. 성인 약 62만명이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뜻이다. 선진국 평균 1.4%에 근접한 수치다. 그렇다면 98.3%의 성인은 문자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걸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영어 때문이다.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도를 따지자면 한국어 못지않은 경우가 많다. 영어는 지식인의 언어에서 생활언어로 넘어온 지 오래다. 영어 비문해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만큼이나 문자 생활이 힘들다. 이들에게 영어를 읽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불편한 일상 이상일 수 있다.

“서울시내에 모르는 골목길이 없는데 영어를 못 읽으니까 손님을 정확한 장소에 내려드릴 수가 없어. 호텔이고 커피숍이고 죄다 간판이 영어잖아. 주변만 뱅글뱅글 도는 거야.”

30년 경력의 60대 택시 기사는 영어 때문에 가끔 길치가 된다고 하소연했다. 1년간 다세대주택 관리를 맡았던 최길자씨도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외부 차량이 들어오면 무슨 차가 왔다고 차 이름을 쓰고 번호를 기록해둬야 하는데 차 이름이 영어잖아요. 적지를 못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건데….”

북한 출신들에겐 이런 상황이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탈북 여성 임향(37)씨는 2007년 8월 남으로 왔다.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철도단과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역에서 안내 방송원으로 일했다. 학교에서 영어도 배웠다. 1주일에 두 시간 수업이었다.

“영어를 배우긴 했지만 강의가 형식적이어서 제대로 읽고 쓰지는 못했어요. 게다가 북에서는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남한사람들이 일러주는 발음은 자신이 알던 것과 달랐다. 일상대화에 섞인 외국어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 식당에서 일할 때 ‘냅킨 가져오라’ ‘부르스타(휴대용 버너) 옮겨 달라’ 같은 말은 못 알아들었다.

“지난해 봄 친구가 던킨도너츠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조선말로 써 있겠지’ 생각하고 무심코 나섰어요. 근데 알려준 장소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그런 간판이 없는 거예요. 한참을 돌다 겨우 친구를 만날 수 있었죠.”

남한사회 적응을 위해 컴퓨터는 필수였다. 인터넷도 해야 하고 문서 작성에도 능해야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를 배우는 데 영어는 너무 큰 장벽이었다.

“딜리트, 엔터, 시프트, 컨트롤…전부 영어잖아요. 수업을 전혀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컴퓨터를 배울 수가 없었어요. 영어를 먼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눈 뜬 장님

조규복씨는 53세가 되던 2008년 8월 영어 학원을 찾았다.

‘영어를 어디서 배워야 하나.’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채 끙끙 앓는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우연히 버스 뒤에 붙은 검정고시 학원 광고를 봤다. 주부들을 위한 영어 왕초보 강좌가 있었다.

기초반은 알파벳 이름과 각 알파벳의 소리 값부터 가르쳤다. 같은 A라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아’ ‘어’ ‘애’ 등 발음이 달랐다. 배운 발음 규칙에 따라 bag, cat, bus 등 쉬운 단어를 읽어나갔다. 기초 단어들을 읽어내는 데 1년 정도가 걸렸다.

“1년쯤 배우니까 쉬운 단어들, family, life, friend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상표 같은 것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고. 정말 눈이 환하게 떠지는 기분이었어요.”

최길자씨도 처음 학원 밖에서 영어를 읽어냈던 날을 기억했다.

“병원에 갔는데 information이라고 적혀 있어요. ‘인포’까지는 읽겠는데 뒤를 못 읽겠더라고요. 그때 학원에서 ‘tion=션’이라고 배웠던 게 기억나는 거예요. 그래서 읽어 보니 ‘인포메이션’인거예요. ‘인포메이션’하고 읽으니까 뜻을 알겠더라고요. 속으로 정말 기뻤어요.”

북에서 온 임향씨도 영어 강좌를 듣고 있다. 새터민 지원 단체가 운영하는 영어강습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버거킹도 읽고, 맥도날드도 읽을 수 있어요. 쉬운 단어도 조금 알게 되고. 외래어를 드문드문 알아들을 때 아주 기분이 좋아요.”

한양학원에선 기초영어반 외에 브랜드 특강도 운영한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영어 간판과 상표 읽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이다. 간단한 뜻도 알려준다. ‘JOINUS’의 발음을 가르치고 ‘우리와 함께하라’는 의미를 알려주는 식이다. 말 그대로 ‘서바이벌 영어’다.

강사 손선미씨는 “학원을 찾는 어머님들은 영어를 잘하려는 욕심보단 일단 읽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발음 기호를 아무리 배워도 읽을 수 없는 브랜드가 많기 때문에 그것만 따로 모아 가르치는 강의”라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문해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이들을 교육하는 데 모두 쓰인다. 예산도 올해 23억, 내년 21억원에 불과하다.

교과부 관계자는 “전체 성인 중 200만명 정도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은행이나 관공서 서식 작성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을 처리하기 어려운 것으로 조사됐다. 62만명의 완전 비문해자까지 더하면 260만명 이상이 한글을 제대로 못 읽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 교육까지 지원하기에는 힘이 부친다”고 말했다.

영어 비문해율은 조사된 적이 없다. 중학교 중퇴 이하 학력자가 약 400만명이니 인구의 10% 정도가 영어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추정해볼 뿐이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