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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김의구] 老망명객의 ‘반쪽 장례식’

[데스크 시각-김의구] 老망명객의 ‘반쪽 장례식’ 기사의 사진

2000년 9월 20일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모스크바 교외 트로이체-리코보에 있는 다차(러시아 시골 저택)를 찾았다. 소련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94년 모국에 돌아와 살고 있던 집이었다. 러시아에서 추방돼 20년간 미국 망명생활을 했던 솔제니친을 첫 대면한 푸틴은 서재로 안내돼 2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9개월 전 러시아 권력을 맡은 푸틴은 솔제니친 탄압을 주도한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이었다.

푸틴은 2007년 6월 12일에도 솔제니친의 집을 방문했다. 국가문화공로상 시상식이 크렘린궁에서 열렸으나 수상자인 솔제니친 대신 부인이 참석하자 자택을 직접 찾아간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푸틴을 맞은 솔제니친은 “바쁜 분이 찾아올 줄 상상도 못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푸틴은 “과학적 탐구와 탁월한 문학적 성과로 조국에 헌신했다”며 찬사를 했다. 회담 후 솔제니친은 푸틴의 과거 경력에 대해 KGB 수사관이 아니라 해외정보 파트에서 일했고, 강제수용소의 책임자도 아니었다고 변호했다.

이듬해 8월 3일 89세의 솔제니친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푸틴은 “그의 고통에 찬 삶은 자유와 정의, 휴머니즘에 사심 없이 봉사한 모델로 러시아와 전 세계에 남을 것”이라며 “러시아인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한다”고 밝혔다. 6일 돈스코이 사원에서 열린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정적들끼리의 악수는 아름답다. 용서가 어려운 필생의 숙적일수록, 또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서야 어렵사리 이뤄진 화해일수록 감동은 더 크다. 솔제니친과 푸틴은 직접적인 악연을 갖고 있지는 않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슬라브 문화의 복원을 주창하는 솔제니친과 대러시아를 꿈꾸는 푸틴의 야심이 화학반응을 일으킨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하지만 20년가량 KGB에 몸담았고 그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의 수장까지 지낸 푸틴과 공안통치의 최대 피해자였던 솔제니친의 만남이 화해의 상징으로 뭉클함을 전해준 것은 분명하다.

14일 치러진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장례는 통일사회장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반쪽짜리’였다. 정부는 그에게 1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치했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장례에 소극적이었다. 민주당은 원내대표가 개인 자격으로 조문했을 뿐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개인이야 알아서 판단할 문제지만 책임있는 공당은 불참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었지만 입장표명은 없었다.

97년 황씨는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북한 최고위층 인사의 망명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국했으나 이후 남북 화해 국면이 전개되며 여러 제약을 받아야 했다. 미국 초청 방문을 둘러싸고 당시 정부와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계속하고 햇볕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대북 쌀 지원과 화해정책을 주장하는 진보세력에게 황씨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죽음은 북한의 3대 세습체제가 공식화되는 시점에 갑자기 찾아왔다. 진보진영으로서는 큰 이슈로 부상한 그의 삶과 죽음에 여유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이 나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북한과 우리의 관계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동포이지만 동시에 적대성도 갖고 있다. 족보로는 형제지만 현실은 이웃국보다 사이가 더 나쁘다. 이 때문에 대북 정책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다층적 현실 속에 논리와 셈법이 복잡해 이를 둘러싼 사회집단이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다.

하지만 73세의 고령에, 오랜 터전을 박차고 남한행을 결행한 정적의 마지막 길에 국화 한 송이를 바치는 인간적 아량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가족·지인들의 숙청이 빤히 내다보이는 길을 걸어야 했던 그의 비극적 삶에 잠시 고개를 숙이는 게 진보의 정체성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하고 남북 관계를 파탄에까지 이르게 할 사안이었을까. 편이 갈린 노(老)망명객의 장례를 지켜보노라니 갖가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김의구 정치부장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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