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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고승욱] 75조 8000억원

[데스크시각-고승욱] 75조 8000억원 기사의 사진

75조8000억원. 정부가 2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위해 2015년까지 5년 동안 투입하겠다는 예산이다. 매년 15조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는 셈이다. 2011년도 우리나라 연구·개발(R&D) 예산이 14조9000억원이다. 2010년 국방예산은 29조5000억원이었다. 숫자가 너무 커 실감이 안 나지만 75조8000억원은 정말 많은 돈이다.

‘인구가 1억명은 돼야 강대국 자격이 있다’는 말은 정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면 첫 학기 강의에서 듣는다. 인구 1억명은 외침에 맞설 군대를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고, 새로운 산업이 내수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국토의 크기나 천연자원 보유같이 고려할 게 많지만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본이 되는 건 역시 사람 수다.

우리나라 인구는 5000만명이 안 된다. 지금의 출산율로 계산하면 2018년에 4934만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줄기 시작한다. 2016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659만명으로 16세 이하 유소년인구 654만명보다 많아진다. 인구역전 현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올해 11%인 노인인구 비율은 2050년에 38.2%로 늘어난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국가운영 자체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나온 게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다.

기본계획을 만들기 위해 2009년부터 국책연구기관 7곳이 함께 연구해 기초 자료를 만들었다. 총리실이 주관해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교육과학기술부, 고용노동부 등 12개 중앙부처가 20차례 넘게 회의를 하면서 틀을 잡았다. 국제학술대회, 각계 전문가를 초빙한 대토론회도 거쳤다. 지난달 시안을 발표하고 공청회를 다시 열어 여론을 반영하기까지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기본계획을 가만히 읽어보면 어딘가 미덥지 않다.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이 계획을 보면서도 좀처럼 아이를 더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이를 왜 더 안 낳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돈이 없어서”라고 답한다.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지만 교육비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번 기본계획에서 교육비 대책은 빠졌다. ‘공교육 내실화, 입시제도 선진화, 사교육 대체 서비스 강화 및 학원 운영의 투명한 관리를 통해 사교육비 부담을 경감한다’는 딱 한 문장이 들어있을 뿐이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 고개를 끄덕일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 나올 리 없다. 그래도 저출산의 근본 문제를 이렇게 피해가기만 해서는 공허할 뿐이다. 육아휴직 기간 중 받는 임금 수준을 높이고, 산전후 휴가 제도를 바꾸는 방법에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육아기에는 근로시간 단축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에 명시하겠다거나 셋째 자녀부터 자녀 1인당 1년간 퇴직 후 재고용을 추진한다는 계획은 어떤가. 공무원이거나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다. 여름휴가 쓸 때도 눈치를 보고, 출산휴가를 다녀오면 아예 자리가 없어지고, 임신하면 회사를 그만두라는 눈치를 받는 각박한 현실에 부대끼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75조8000억원이 들어가는 기본계획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진수희 복지부 장관은 “저출산·고령화 기본계획을 복지정책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 아이를 더 낳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구를 늘리자면서 비정규직 근로자와 저소득층 여성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비난할 수 없다. 정책의 기본 취지가 다르다. 분배의 문제를 다루는 시각으로 접근하기에는 국가적으로 너무 큰 과제다. 진 장관도 42조2000억원이 들어간 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평가하면서 전반적인 국민체감도가 낮았다고 한계를 인정했다. 2차 계획이 끝나는 2015년에 국민체감도는 높아질까. 정부가 이번 계획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공무원 처우개선책’이라는 극단적인 비난까지 나오는데 말이다.

고승욱 사회부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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