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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이성훈] 탐욕의 결말

[삶의 향기-이성훈] 탐욕의 결말 기사의 사진

토머스 커스틴이라는 역사물을 저술하는 작가가 유럽 벨기에 왕가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을 썼다. 그 중에 ‘3명의 에드워드’라는 글이 있는데, 주인공은 레이놀드라는 왕자이다. 이 사람은 차기 왕이 될 사람이었는데, 부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그 동생 에드워드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형 레이놀드를 유커크라는 성에 가두면서 원하면 언제든지 창문을 통해 나가 자유인이 되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 방의 창문은 극히 작았던 반면 레이놀드 왕자는 너무나 뚱뚱해서 좁디좁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탐식에 굴복한 왕자

동생 에드워드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서 말했다. “형이 몸무게를 줄이고 저 창문을 통해 나올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형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하겠다. 그렇지 못할 경우 나는 왕의 자리를 형에게 내줄 수 없다. 자기 몸무게 하나 조절할 수 없을 만큼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방을 경비하는 이들에게 레이놀드 왕자가 원하는 대로 풍부한 음식과 간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했다. 레이놀드 왕자는 10년 동안이나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동생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다. 이는 단지 레이놀드라는 왕자가 왕위를 빼앗기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평생 탐식이라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탐식의 감옥에서 살다간 사람의 결말 때문이다.

비극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 식욕을 억제하지 못한 채, 탐식의 감옥에서 비참한 날들을 보낸 것처럼, 우리는 평생토록 자신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탐욕의 감옥에서 지내다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이들을 주위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잊을 만하면 반복적으로 터지는 기업인의 비리와 이들을 비호하는 정·관계 인사들의 절제되지 못한 욕심으로 인한 범죄행위는 참으로 미련스럽다.

죄에 대한 성역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때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한 생계형 범죄는 최소한의 동정과 이해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선량한 민심의 동정조차 얻지 못하는 비리를 저지르고 무너져 가는 이들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공자가 ‘40이면 불혹’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잘살고, 형편이 좋을수록 유혹은 갑절로 많은 법이다. 욕심이 보여주는 종착지는 매우 황홀해 보이고, 대단한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나 이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탐욕이란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을 가리키는데, 문호 단테는 이 탐욕을 ‘그 어느 누구도 절대로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까지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욕심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욕심의 종착역은 사망이니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욕심은 죄를 낳게 되고, 죄가 나를 다스리게 될 때,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그런데 이것은 무척 위험한 말일 수 있다. 이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사랑이 매우 많으셔서 절대로 죄인을 벌하지 않으신다고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죄와 함께 파멸되기 때문이다.

이성훈(남부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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