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이념의 우상에서 해방돼라 기사의 사진

“개헌하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제1야당인 신민당의 당권파 수뇌가 짜증을 냈다. 이철승 대표의 당권파는 김영삼의 비당권파로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강경 투쟁을 하자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며칠 후 당직자 회의에 S 전 의원이 당권파 수뇌 앞에서 보따리 하나를 풀어 젖히며 “자 여기 밥도 있고 떡도 있소. 이제 개헌 투쟁을 합시다”라고 외쳤다. 밥과 떡이 나와야만 개헌 투쟁을 하겠단 것이냐, 밥과 떡이 민주화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냐는 항변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때론 100%의 찬성으로 박정희 단일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던 1970년대 유신시절 얘기다. 당시 이철승 대표는 유신체제를 인정하고 극한적인 개헌 투쟁보다 여야가 민생 위주의 정책대결을 벌이자는 입장이었다. 양극단을 벗어나 가운데에서 만나자는 이른바 중도통합론이었다. 이철승은 유신체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정권과의 전면 투쟁을 주장하는 김영삼, 김대중 측으로부터 사쿠라로 매도됐다.

말처럼 쉽지 않은 중도통합

그 중도통합론이 30년도 더 지난 요즘 들어 각광을 받고 있다. 먼저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지난 10월 전당대회 대표 수락연설을 통해 “진보와 개혁 중도를 끌어안는 통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한나라당의 안상수 대표도 지난주 국회 연설을 통해 “당의 강령을 (보수에서) 개혁적 중도보수로 바꾸겠다. 진보적인 목소리도 과감히 수용하겠다”고 천명했다. 손 대표와 안 대표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치우친 당 이념의 좌표를 한 클릭씩 가운데로 옮기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여야 모두 그렇게 해서 이념적으로, 또 계층적으로 중도이거나 상대 정당에 가까운 유권자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포석이다. 중도통합을 통한 외연 확장 전략인 것이다.

이는 정치권의 이념 과잉에 다수 국민이 식상해 있다는 자각에 따른 좌표 수정 시도이기도 하다. 시도가 성공한다면 여야가 이념이나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중도 실용주의에 입각한 민생 경쟁, 즉 더 많은 국민이 더 잘 살게 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기자는 3주 전 이 난에서 “모든 사안을 진보냐 보수냐의 2분법으로 나누지 말라. 중도를 포용하겠다”는 손 대표의 발언을 환영한다며 부디 이념의 벽을 뛰어 넘으라고 당부했었다. 또 지난주 안 대표가 “진보적 목소리도 과감히 수용하겠다”고 했을 때는 여당도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며 여야가 이제 본격적인 생활 정치로 대결할 것을 기대했었다.

시대착오적인 이념대결

그러나 여야 대표의 중도통합 의지와는 달리 각기 이념의 벽을 뛰어 넘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다. 손 대표는 취임 직후 4대강 사업이나 한미 FTA 등에 대해 다소 신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당 강경파의 입장으로 선회한 느낌이다. 한나라당도 안 대표의 개혁적 중도보수로의 전환 천명이 있은 직후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 세율을 낮추기로 한 이른바 “부자감세정책”의 철회를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 내외의 보수로부터 좌파에 끌려 다닌다는 공격을 받고 꼬리를 내리는 느낌이다. 여야 모두 당 안팎의 좌우 이데올로그(이론가)들로부터 “보수정당의 정체성을 망각한 발상”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태”라는 등의 이념 공세를 못 이기는 것 같다.

기자는 이런 정책들이 왜 이념의 차원에서 다툼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독재정권 시절이라면 여야가 체제 투쟁보다는 정책대결을 하자는 중도통합론이 사쿠라로 매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 부분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래서 양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념이나 체제 투쟁을 지양하고 정책대결을 하자는 중도통합론이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에 좌우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시대착오적이고 후진국 현상이다. 특히 조세정책이나 4대강 사업, 한미 FTA 같은 사안이야말로 이념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적절치 않아 보인다. 여야 모두 이념이라는 우상으로부터 해방돼 무엇이 국익에 도움이 되고, 무엇이 더 많은 국민에게 더 큰 혜택을 주는가를 따져 국정에 임해야 한다.

백화종 부사장 wjba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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