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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승만 (4) 믿음의 아버지 슬하 연단의 어린시절

[역경의 열매] 이승만 (4) 믿음의 아버지 슬하 연단의 어린시절 기사의 사진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은 독특한 연단의 시기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어떤 길이 옳은가’에 대해서 일찍부터 생각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길을 쉽게 갈 수 없도록 길목마다 막으셨다. 그 때문에 자연히 어린 날부터 내 마음속에는 울분이 쌓였다. 똑같은 환경이어도 3남4녀 중 나만 유독 분을 못 참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모태에서부터 그런 성정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독교적 뿌리는 할머니 김효신 전도사께로부터 시작됐다. 평양 서성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셨던 할머니는 신앙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큰 오해와 핍박을 받았다. 어떤 날에는 집에도 들어갈 수 없어 선교사 댁에 머물곤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생각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를 외치시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한번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홍수 때 집으로 들어온 물을 퍼내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평양 보통강 근처에 사셨기에 장마 때면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믿음이 저리도 좋은 할머니를 하나님은 왜 힘들게 하실까’ 생각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가난과 핍박 속에 살 수밖에 없나보다. 그래야 믿음이 더 뿌리를 깊이 내리나보다’ 하는 생각이 시나브로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의 두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됐다.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경신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18세의 나이로 3·1 운동을 경험하고 민족 독립에 대한 강렬한 사명에 눈을 뜨셨다고 한다. 독립만세 사건으로 일경의 주목과 감시가 심해지자 한동안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해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셨고, 그 후 평양 숭실학교에 편입했을 때는 ‘학생의열단’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해주 형무소에 투옥되셨다. 1년 후 석방은 되었으나 학업의 길이 막히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중앙대학 예과와 상과를 졸업하셨다.

이때 어떤 계기인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 공부할 결심을 했고, 귀국 즉시 경성성서학원, 현재의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셨다.

졸업 후 충남 금산 읍내의 금산성결교회 초대 교역자로 파송받아 가정을 이루고 목회하며 사신 3년간이 아버지 인생에서는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거세지자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가셨고, 이때부터 늘 피신을 다니셔야 했다.

이런 처지니 자식들로서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살림은 자연히 어머니 몫이 됐다. 다행히 외가가 부유해서 원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늘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외가에 드나드셔야 했다.

내가 열 살 되던 1940년, 두 살 위인 승욱 형이 당시 명문이던 평안공업학교에 합격했다. 가족 모두는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외가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외삼촌은 “아니,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학교를 보내려고 하지?” 하고 코웃음을 치셨다. 평소 얌전하셨던 어머니는 이때만큼은 분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라도 공부시킬 테니 염려 마세요!” 하고 소리를 치셨다. 곁에서 이를 지켜봤던 나는 너무나 통쾌해서 짜릿한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애쓰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는 늘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한 뒤 효도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인생길은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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