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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승만 (8) 목사 아버지 공산당에 끌려가 순교

[역경의 열매] 이승만 (8) 목사 아버지 공산당에 끌려가 순교 기사의 사진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한 번은 퇴학을 당해, 한 번은 학교가 폐교돼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일은 내게 큰 좌절감을 줬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두 번의 공백기는 내 인생에서 아주 중대한 시기였다.



평안공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을 때 집에서 아무 할 일이 없던 나는 아버지께서 숭실전문학교에 다니실 때 쓰던 영어책과 사전을 가지고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다. 공산 치하의 이북에서는 외국어는 오직 소련어만 배울 수 있었고 영어를 배우다 발각되면 가르친 사람도 배운 사람도 모두 처벌을 받았다. 이때 영어를 파고든 것은 내 나름의 소극적 저항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께서는 내 심정을 이해하셨는지 영어 선생님을 모셔와 개인 교습을 시켜주셨다. 변변한 교재가 없으니 영문법책 한 권을 통째로 암기했고, 나중에는 사전까지 외웠다. 밤이나 낮이나 머릿속에서 영어 문장을 조합해 보고,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성화신학교가 폐교 당했을 때도 나는 영어 선생님 댁에 몰래 드나들며 공부했다. 불심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영어 책을 숨겨 들고 앞문으로 들어갔다 뒷문으로 나와야 했을 만큼 위험했는데도 나는 무작정 영어에 몰두했다.

그때 익힌 영어는 몇 년 후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재산이 됐고, 소중한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줬다. 한 걸음 앞만 보면서 끙끙대며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 언덕 너머에 새로운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6·25전쟁이 터졌다. 폭격이 점차 심해지자 부모님은 형과 나, 남동생 삼형제만 평양에 남겨둔 채 여동생들을 데리고 평안남도 강서로 피란을 가셨다. 그런데 10월 11일,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들을 보러 평양으로 오셨다가 공산당원에게 붙잡히시고 말았다. 우리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셨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때 평양에 남아 있던 목사들은 거의 그렇게 잡혀 갔다. 훗날 그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에게서 아버지께서 모진 고문과 취조 속에서도 신앙의 의지를 꺾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10월 20일 연합군이 평양에 입성했다. 숨죽이며 지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고 우리를 비롯해 잡혀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그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동으로 서로 뛰어다녔다.

어머니도 희망을 품은 채 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하셨으나 결국은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방공호 속에서 다른 목사들과 함께 사살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셨다.

기가 막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고 나자 비로소 ‘박해’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냥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무참히 빼앗는 것이었다. 내게는 보물인 것을 휴지조각인 양 짓밟아 버리는 것이었다. 인간 자체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지독하게도 잘못됐습니다. 비뚤어졌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까? 전능하십니까? 그런데도 이 고통을 두고만 보십니까!”

통곡하는 어머니와 훌쩍이는 동생들 곁에 앉아서 내색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절규했다. 그런 가운데 마치 속삭이듯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아버지가 못 다 이룬 일을 네가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젓기도 하고 못 들은 척도 해 봤다. 그러나 그 음성에 대한 기억은 마음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내게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됐다. 1950년 12월 3일, 남동생 승규와 둘이서 남으로 피란을 떠난 것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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