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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승만 (9) 어머니·누이들 평양에 남겨두고 동생과 피란

[역경의 열매] 이승만 (9) 어머니·누이들 평양에 남겨두고 동생과 피란 기사의 사진

1950년 12월 3일. 신발을 신고 뒤를 돌아봤다. 열네 살 경신이, 열 살 경옥이, 여덟 살 경주, 태어난 지 반년밖에 안 된 경복이, 그리고 어머니…. 나와 승규는 이렇게 다섯 여자만 남겨두고 집을 떠나야 했다. 전쟁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불길한 소문이 평양을 휘감고 있었다. 전선이 더 어지러워지면 원자탄이 사용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숱한 사람들이 평양 시내를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우리는 동생들이 너무 어려 피란을 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다 함께 남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상황이 남자들에게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셨다. 얼마 전 집을 떠난 형에게서 소식이 없어 불안해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전쟁통에 아들들을 다 잃을까 염려해 피란을 강권하셨던 것이다.

“대동강만 건너가서 이삼 일만 지내고 올게요.”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는데 어머니께서 쫓아 나와서 손을 잡으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서 가라고 재촉하셨는데 어느덧 울고 계셨다.

“너희들이 이제 이렇게 떠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또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니 기도 가운데서 서로 만나자꾸나.”

지나고 보니 그것은 어머니의 예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손을 놓는 순간 뇌리에 남은 어머니 얼굴, 손의 감촉, 눈물어린 목소리는 내 인생의 책에서 접어둔 페이지다. 늘 그 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인생은 뒤로는 걸어갈 수 없도록 돼 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평생의 고통 속에서 어렵게 배웠다.

나와 승규는 성화신학교 선배와 그 가족 등 몇 명과 함께 대동강변으로 갔다. 인산인해를 이룬 피란민들은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리하게 건너려다 강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목격했다. 다행히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배에 끼여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 건너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빈 집에서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새벽이 되기도 전에 폭격이 시작됐다. 귀를 찢는 폭발음과 섬광 속에서 우리는 “중공군이 가까이 왔나 보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등을 떠밀 듯이 폭발음은 계속해서 들려 왔다.

밤새 걷고 화물열차 지붕 꼭대기에 매달려 타고 간 끝에 개성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널찍한 곳마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불을 피우고 큰 깡통에 밥을 지어 먹곤 했다. 우리는 그런 대열에 끼여 한 끼 한 끼 얻어먹으며 버텼다. 다시 남쪽으로 출발해 걷기도 하고 트럭 끝에 매달리기도 하며 겨우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쁨은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불안감만 밀려 왔다.

일행은 흩어졌고 나와 승규는 먼저 월남해 청파동에 살고 있다는 외삼촌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두 다리에 맥이 탁 풀렸다. “이 하늘 아래 우리 형제 둘뿐이구나!”

목적지도 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낯익은 사람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 보였다. 쫓아가 보니 전쟁 직전에 월남했다던 큰아버지였다. 가장 막막한 순간에 큰아버지를 서울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 꿈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큰집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오래 신세를 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을 받았다. 서울에서 만난 성화신학교 동창들이 “유엔군에 자원입대하자”고 한 것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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