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럼-이성근] 통일을 위해 국회가 할 일 기사의 사진

“북한의 포악한 권력시스템은 돌이킬 수 없어… 국회가 흡수통일 의지 보여야”

벌써 10여년 전 일이다.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북한 중진학자가 북한 경제 사정이 잘 풀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말하면서 원망 섞인 어조로 푸념하던 게 기억난다.

“북한도 잘살아 보려고 노력할 만큼은 했다. 그 결과, 자체기술로 웬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단지, 경공업이 약해 생필품이 부족하기는 하나…그러나 오늘날 경제 상황이 여의치 못한 것은 결국 줄을 잘못 섰기 때문이다. 남한 경제가 나아진 것은 줄을 잘 섰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동포인 남조선은 우리가 미국과 교류를 하려 해도 훼방만 놓고….”

나는 나지막하고 단호하게 일러주었다. “줄만 잘 서면 저절로 잘살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결국 그 나라 사람들이 하기 나름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필리핀이란 나라를 예로 들었다.

40년 전 나는 필리핀에서 몇 년간 유학해 비교적 그곳 사정을 잘 안다. 당시 그 나라는 우리보다 훨씬 잘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발전 속도가 아주 더뎌 지금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훨씬 앞선 나라가 됐다. 필리핀은 전 세계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나라일 것이다. 그들은 ‘타갈로그어’란 국어를 채택하고 있으나 공용어라 부르는 영어에 더 익숙해 있다. 자연환경이 좋아 쌀은 3모작이 가능한 나라다. 여러모로 우리보다 발전 조건이 좋은 나라였다. 그런 그들이 ‘줄’을 잘못 서서 고생하는 게 아니다.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정치지도층은 특권적 기득권에 안주하려 했고, 국민은 사회부조리를 타파하려는 개혁의지가 약해 권력에 굴종하려는 안이한 생활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그의 반론은 없었고,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헤어진 일이 있었다. 나는 지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10년 전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면 자신의 무기력감을 탄식하고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씨 왕조 폭력기구를 지탱하기 위해 삼대(三代) 권력세습을 하고, 굶주리는 인민들의 처절함에 눈감고, 핵개발에 집착해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고, 이웃 대국인 중국 지도부의 눈 밖이라도 나지 않을까 잠 못 이루는 나라. 이처럼 갈 데까지 가고 있는 포악한 권력시스템의 몸부림을 목도하면서도 소리 한번 쳐보지 못하고 눈물짓고 있는 한없이 나약한 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비굴함과 자책 속에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북한의 포악한 권력시스템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권력 전면에 아비와 어린 아들, 누이와 매부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중국의 품속에 깊숙이 침잠할 수밖에 없다고 작심한 모양이다. 벌써 거덜 난 경제 파탄으로 생필품의 80% 이상을 중국 생산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다. 미약한 에너지 소모에도 불구하고 그 공급량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근 북한은 ‘라진항’ 부두 일부를 중국에 빌려주었다. 이미 가장 큰 부두는 러시아에 50년 계약으로 양도한 지 오래됐다. 그래도 자존심에 따른 최소한의 저항 표시인지 아니면 더 좋은 조건을 계속 요구하기 위한 계산에서인지 중국에 대한 양여는 러시아 조차(租借) 기간 50년의 5분의 1인 10년 단위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

이 처절한 현실을 우리는 보고만 있어서 안 된다. 북한 전역이 이웃나라 경제에 편입돼 버리고 난 후엔 통일은 멀리 물 건너 갈 수도 있다. 중국의 북한 독식을 러시아가 뒷짐 지고 바라만 보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아 국제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원만한 북한 흡수통일 조건을 하루속히 마련하고, 당당하게 흡수통일 원칙의 당위성을 주장하라. 그 첫 단계는 우선 통일 후 노동당 수뇌부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통일의지를 전체회의에서 결의해 만방에 공표하라. 아직도 북한에는 제2, 제3의 황장엽이 수없이 있음을 상기하라. 통일이 되면 얻는 것은 전 인민의 자유와 행복이며, 잃는 것은 3대에 걸쳐 굶주림을 강요하는 폭압적 통제시스템이란 확신을 갖게 하라.

이성근(전 한성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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