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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승만 (12) 부산 감신대 입학 위해 해병학교 탈영

[역경의 열매] 이승만 (12) 부산 감신대 입학 위해 해병학교 탈영 기사의 사진

해병대 신병훈련이 3주째 접어들었을 때 해병부대 본부에서 영어 능력 보유자를 선발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신병 중 40여명이 지원했다. 나를 비롯해 성화신학교 동기들은 전원 응시했다. 나는 필기와 회화시험을 통과해 3인의 최종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동생 승규는 회화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떨어졌다.

합격자 3명에게는 진해 해병학교에서 영어교재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후면 전방에 배치될 동생 승규를 생각하면 기뻐할 수가 없었다. 교재과로 가는 것을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상관에게 얘기했지만 “누구 맘대로 안 가? 지금 교재가 없어서 난리인데, 군대가 무슨 장난이야!” 하는 불호령만 들었을 뿐이었다.

“승규야. 밥 잘 먹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거다. 우리 꼭 다시 만날 거야” 하며 동생을 훈련소에 두고 짐을 싸서 나오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을 고비마다 동생을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텨 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다행히 그것이 헤어짐은 아니었다. 교재과에 가 보니 서울의 대학교수들까지 불려와 교재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 나도 7일 만에 책 한 권 번역을 마쳤다. 문제는 이 번역 내용을 등사해서 교재로 만들려면 누군가 철펜으로 등사지에 옮겨 적어줘야 했다.

나는 상관에게 “제가 펜글씨까지 쓰면 시간이 두 배로 걸립니다. 펜글씨에 능한 사람을 두고 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로 동생을 추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승규가 교재과로 오게 됐다. 내가 번역하면 승규가 철펜으로 쓰는 호흡이 워낙 잘 맞아 우리는 장교들에게 칭찬을 받게 됐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은 것과 같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감사기도를 드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학업의 길이 막혀 불만 속에서 끙끙대고 있을 때 소일거리로 공부했던 영어가 우리 형제를 지켜 준 것이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앞이 캄캄할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감사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또 불만거리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1952년 해병대에 군목제도가 신설되면서 나는 군목실로 옮겨가게 됐다. 이때부터 학업에 대한 열망에 다시 불이 붙었다. 안 그래도 성화신학교 동창 중 몇몇이 부산에 임시로 설립된 감리교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을 보고 부러워하던 차였다. 목사 안수를 받고 배치된 해병대 군목들을 보면서 “지금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이 문제로 군목실 유제선 목사님과 여러 차례 상의를 해 봤지만 당장 군대를 그만두고 학교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군에 들어온 지 2년째인데도 공부할 방법은 없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옥죄어 왔다.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탈영을 하기로 한 것이다. 동생도 뜻을 같이하겠다고 해 함께 해병학교를 탈출하기로 했다. 영외에 있는 유 목사님 댁에서 하루를 묵는다는 명목으로 빠져나가 다음 날 새벽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탈영병은 즉결처분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부산 감리교신학교에 입학이나 해 보고 죽자”는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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