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13) 학교 찾아온 군목실장 설득에 부대 복귀

[역경의 열매] 이승만 (13) 학교 찾아온 군목실장 설득에 부대 복귀 기사의 사진

부산에 도착해서 성화신학교 은사인 김학수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아무리 공부가 하고 싶다고 탈영을 한단 말이냐”며 난감해 하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셨는지 다음날 아침 우리 형제를 부산 감리교신학교에 데리고 가 입학시켜 주셨다.

승규와 나는 학교 복도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교환했다.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잊은 채 학생이 됐다는 데만 기뻐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어렸던 시절이다.

신학교의 김용옥 목사님께서는 사정을 들으시더니 우리 형제의 향학열을 기특하게 여겨 보호자를 자청해 주셨다. 그렇게 일주일여 지내고 있는데 상관인 이원동 군목이 찾아왔다.

“지금 빨리 복귀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이 나에게 돌아온다. 당장 돌아가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형제에 대한 평판이 좋아서 “탈영할 사람들이 아니니 해당 부서인 군목실에서 찾아 데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완강히 버텼다. 이 군목은 “헌병을 불러 잡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화를 내며 돌아갔다.

이제 학업의 길도 막히고, 목사의 길도 막히는가 싶어 불안감으로 밤을 지새웠다. 신학교 친구들은 “여차하면 도망가거라, 우리가 도와주마”하기도 했다. 다음날 해병대 사령부 군목실장 박창번 목사님께서 찾아오셨다. 군목실 최고 지휘관으로 나이 지긋한 분이었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목사님은 우리에게 “조용한 다방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다방 한쪽 구석에 마주 앉은 목사님은 우리 손을 꼭 잡으시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그 울음소리에서 우리 형제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나와 승규도 서러운 마음에 함께 울었다. 조그만 다방 안은 세 남자의 울음소리로 꽉 차고 말았다.

“너희 형제를 보니 내가 너희만할 때 일본에서 고학하면서 고생하던 생각이 나는구나. 얼마나 힘든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단다. 공부하고 싶은 너희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내가 너희가 공부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길을 열어 줄 테니 나를 믿고 부대로 돌아가자. 이것이 정말 너희가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설득에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죽어도 부산에서 죽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사랑의 눈물 앞에서는 어떤 단단한 둑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형제는 박 목사님의 지프차를 타고 그날 해병학교로 복귀했다. “저희들이 군법을 어기고 잘못했습니다. 탈영병으로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행정처장 김한수 대위 앞에 가서 영창에 갈 각오로 복귀 신고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 두 형제는 공부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니 특별히 고려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외출을 허락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당장 영외에 나가 저녁마다 영어학원을 다녔다. 몇 개월 후부터는 사령부 군목실에서 근무하며 그렇게 원하던 감리교신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 갈 때마다 콧노래로 찬양이 절로 나왔다.

승규도 사령부 군목실로 옮겨와 근무하다가 부산 한영고 3학년에 편입해 고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고, 마침 그때 생긴 ‘의가사제대’ 법 덕택으로 제대해 부산에 내려와 있던 연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승규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며 마음에서 큰 벽돌 하나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승규는 내 도움 없이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동안 내가 이를 악물고 살아올 수 있도록 버팀목이 돼 준 승규에게 깊은 고마움도 느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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