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45) 연기 없이 타는 가슴 기사의 사진

문살 사이로 등잔불이 얼비치는 단칸 누옥이다. 나어린 서생이 늦도록 책을 읽는다. 반듯한 정자관에 또렷한 이목구비, 서생의 낯빛이 야물다. 보름달이 떴는가, 마당은 쓴 듯이 환하고 사립문 얽은 가닥이 훤하다. 잎 지고 헐벗은 나무를 보니 때는 늦가을이렷다.

어느 결에 찾아들었나. 치렁치렁한 낭자머리 처녀가 기둥에 숨어 책 읽는 소리 엿듣고 있다. 한 발을 주춧돌에 걸친 그녀는 행여 들킬세라 숨소리를 낮춘다. 이러구러 댓 식경이 넘어도 서생은 기척을 모른다. 야속한 마음에 살포시 여닫이를 잡았건만 왔단 낌새가 알려질까 부끄러운 그녀다. 발소리 숨소리 죽여도 차마 감추지 못하노니, 두방망이질하는 가슴과 수심 찬 얼굴이다.

정황이야 캐볼 바 없다. 처녀는 서생을 마음에 품은 지 오래다. 밤마다 고양이 걸음질로 다가가지만 서생은 돌아앉은 목석이다. 애절타, 상사병이 달리 오랴. 그 심사 헤아린 옛 노래꾼은 애저녁에 읊었다. ‘사람이 사람 그려 사람 하나 죽게 되니/ 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아 사람 살려라, 사람 우선 살고 보자’ 서생아, 돌아 보거라, 연기 나지 않고 타는 가슴 있다.

그림은 실박하다. 혜원 신윤복의 붓질을 따라 그렸지만 혜원 그림은 아니다. 세련미가 뒤진다. 하여도 시골 처녀의 꾸밈새처럼 수더분해서 정답다. 서책 덮고 등불 끄고 서생이 잠들어야 저 처녀 돌아갈까. 돌아서며 구슬피 부른 노랫가락이 상금도 들린다. ‘임 그린 상사몽이 귀뚜라미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 임의 방에 들었다가/ 날 잊고 깊이 든 잠 깨워볼까 하노라’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