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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승만 (14) 미 해병학교 6개월 연수 인생 활로 찾아

[역경의 열매] 이승만 (14) 미 해병학교 6개월 연수 인생 활로 찾아 기사의 사진

가족 중 둘이서만 피란 와서 갖은 고비마다 서로 의지했고 해병대에도 함께 입대했던 동생 승규가 1953년 의가사 제대로 군대를 떠나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내 인생의 행로도 조금씩 방향을 잡아갔다.

어느 날 부대 게시판에 미국 해병대 해병학교로 연수 갈 사병을 뽑는다는 광고가 붙었다. 응시과목은 영어뿐이었다. 입대 직후 교재과에서 영어 교재를 번역했고, 이후 부산부두 외자과에서 2년 가까이 미 해병들과 근무한 덕에 영어 실력은 자신 있었다. 청소년기 평양에서 학업의 길이 막혔을 때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틈틈이 기초를 쌓아둔 영어가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열어 준 것이다. 응시 결과 사병 합격자 중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성화신학교 동기인 함성국도 합격했다. 비록 어렵게 입학해 다니고 있던 부산감리교신학교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쉽게 오지 않을 기회여서 선뜻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53년 9월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다. 해병학교는 워싱턴DC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버지니아주 콴티코에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지평선에 닿도록 펼쳐진 푸른 잔디와 한가로이 오후를 즐기는 가족들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한동안 이 장면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몇 년째 전쟁의 상흔과 피란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봐 오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도 주일예배를 빠짐없이 드렸다. 부대 안에도 부속 교회가 있었지만 나는 미국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부대 주변 교회들도 몇몇 방문하곤 했다. 그럴 때면 종종 한국에 대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와 성국이가 전쟁으로 이북에서 부모형제들과 헤어져 피란해 온 처지라고 말하면 성도들은 놀라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다가와서 위로를 전해 주기도 했다.

또 어려서부터 새벽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있어서 아침마다 부속교회에 나가서 통성기도도 하고 찬송도 불렀다. 그럴 때마다 이국땅에서 이렇게 기도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담임목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기쁠 때 오히려 소리 내 찬송하고 기도를 한답니다.” “오, 그렇습니까?” 목사님은 무척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나에게 소중한 휴가와 같던 6개월여의 연수 생활을 마치고 1954년 2월 귀국했다. 그러자 ‘학업을 마쳐야 한다’는 부담이 다시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에 함께 배치돼 일산 문산과 금촌 지역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리고 서울 장사동에 위치한, 현 강남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신학교 야간부에 등록했다.

당시 해병여단 최고 지휘관인 여단장 김대식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교회 장로여서 내가 신학교에 다니도록 특별히 허락해 줬다.

일과를 마치면 서울로 가는 트럭 짐칸을 얻어 타고 장사동까지 가야 했다. 3시간을 달려 내릴 때가 되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 됐다. 그렇게 2시간 공부하고 다시 3시간 걸려 돌아와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트럭 안에서 나는 공부에 매달렸다. 달리 공부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대로 돌아오면 새벽 1∼2시가 돼 있곤 했다.

1년반이나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겠다는 일념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중앙신학교 역시 마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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