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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김용백] ‘린치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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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떠올랐다. 미국이 함대를 동원해 강화도를 초토화시키면서 조선(朝鮮)에 통상개방 압력을 넣었던 사건이다.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과 미국의 모습에서 그런 역사적 씁쓸함이 느껴진다.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둔 지난 4∼11일 서울에서 한·미 FTA 추가협의가 있었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 측은 무리한 요구로 한국 측을 밀어붙이면서 강짜를 부리다가 일단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를 두고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은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서의 ‘최대 실패’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앞으로도 수개월간 타결이 힘들 거라고 전망했다. 엄살일 뿐이다.

한국 정부는 추가협의 결렬 일주일도 안 돼 벌써부터 수정협정을 고려한다고 밝혔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협정문 수정 불가가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니라고도 했다. ‘협정문 수정 불가 입장을 고수한다’는 철석같은 공언(公言)은 온데간데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일찌감치 ‘제대로 된 합의’를 강조하면서 몇 달이 아닌 몇 주 내로 마무리하는 게 목표라고까지 확신에 찬 발언을 했다. 갈수록 미국의 어조(tone)는 강해지고 있다. 한·미 FTA 협정문 수정을 요구하는 미국 내 분위기는 한껏 고조돼가는 분위기다. 그만큼 미국은 다음달 홈그라운드에서 한·미 FTA를 공세적으로 다룰 공산이 크다.

서울에서 추가협의 결렬은 협정문 수정이 불가피할 정도의 미국 측 요구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의 정치적 부담과 한국의 정치적 부담이 맞서 합의점을 못 찾았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초강대국의 위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전략은 출중하다. 2007년 4월 협상 타결 3년7개월 만에, 2003년 준비부터 치면 7년 만에 재협상 상황을 이끌어내고 말았다. 2007년 6월 추가협상과 협정문 서명 과정에선 또 얼마나 그악스레 굴었는가. 참으로 목표 지향적이다.

한국과 미국은 혈맹국임을 서로 강조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6월 캐나다 토론토 G20 정상회의 뒤 한·미동맹에 대해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태평양 전체 안보의 린치핀(linchpin)”이라고 말했다. 린치핀은 마차나 수레, 자동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게 축에 꽂는 핀으로 조직·계획 등의 ‘핵심’ ‘구심점’을 뜻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아시아 순방길에 나선 지난달 28일 하와이에서 가진 미국의 대(對)아시아전략 관련 연설에서 다시 ‘린치핀’을 언급했다. ‘심지어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라는 수사(修辭)도 덤으로 얹었다. 그러면서 그는 “군사적 협력을 넘어 우리 양국은 활발한 경제적 관계도 즐기고 있다. 이는 두 대통령이 서울 G20 정상회의 때까지 한·미 FTA 미해결 쟁점을 해소할 것을 요청한 이유”라고 말했다. 한·미동맹을 앞세워 한·미 FTA 추가협의가 어때야 하는지를 한국에 알리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한·미동맹과 외교·통상에 있어 한국을 결코 대등하게 생각지 않는 미국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당시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이었던 매튜 슬라우터는 한·미 FTA 타결 보류와 관련해 타이르듯 지적했다. 미국이 국제적 약속을 이행치 않으면서 되레 상업주의나 남의 손실로 이익을 얻는 자기중심적 정책들(beggar-thy-neighbor policies)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고. 한·미 FTA 재협상 결과는 오바마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중 누가 정치적 부담을 더 질 것인지로 판가름 날 것이다. 부담을 덜 지는 쪽이 서울 G20 정상회의 최종 과실을 딴다고 하겠다.

미국 정부는 “기업·근로자를 위하고 국민이 수긍하는 쪽”으로 한·미 FTA 협상을 타결짓겠다는 방침을 공언하고 있다. 국격(國格)을 중시해야 한다는 우리 정부도 그런 명실상부한 협상을 해야 마땅하다. 한국이 진정한 ‘린치핀’이 되도록 말이다.

김용백 국제부장 yb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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