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17) 루이빌 신학교의 교훈 ‘교회는 하나다’

[역경의 열매] 이승만 (17) 루이빌 신학교의 교훈 ‘교회는 하나다’ 기사의 사진

미국 루이빌 장로교신학교로 진학한 일은 여러 가지로 내 인생에 영향을 줬다. 첫째로 당시 학교는 미국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에 동시에 속해 있었다. 미국장로교회는 남북전쟁 중에 두 개로 갈라졌는데 대부분 신학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가입했다. 그러나 이 신학교만은 완강하게 교단 분열을 반대했고, 양 교단 모두에 속해 있기를 고집했다.

나는 이 학풍 속에서 ‘교회는 하나다’ ‘형제는 갈라졌다 해도 다시 하나가 될 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게 됐다. 그리고 1983년 북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일할 때 이 남·북 장로교회가 123년 만에 통합할 수 있도록 작으나마 힘을 보탰고, 남북한의 통일 문제, 초교파 연합운동 등에도 비전을 가지게 됐다.

또 하나는 흑인 인권운동과의 만남이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백인 동네에 집을 살 수 없었으며, 호텔이나 공공시설에 출입할 수도 없었다. 많은 대학이 흑인 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장실이나 버스에서조차 구분된 구역을 벗어나면 가차 없이 쫓겨났다. 심지어 버스 사고가 나면 기사는 백인 부상자만 보호하고 흑인 부상자는 길에 방치했다. 병원에서도 흑인은 아무리 위급한 환자여도 치료를 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빌은 그 중에서도 흑백 갈등이 심한 지역이었다.

물론 동양인들은 이 흑백 갈등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입장이었다. 동양인 학생과 교수들은 다들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특히 당시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살아남기’에 급급해 있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미국 사람들의 평균 수준 정도로 사는 것이 당면 과제였고, 다음은 자녀들을 잘 교육시켜 사회 주류에 편입시키는 것이 그 못지않은 삶의 목표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공부를 마치면 떠나야 할 땅이었고, 전쟁 직후 황폐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온 조국 걱정에 미국 사회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어서 학위를 따 한국에 돌아가자, 조금이라도 평양의 가족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 살자는 생각만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나 보다. 나를 미국까지 보내 공부를 시키신 것도, 다른 곳도 아닌 켄터키 루이빌에서 신학을 하게 하신 것도, 지금 돌아보면 다 그분의 세심한 계획 아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3년 만에 루이빌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루이빌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루이빌 신학교 교목을 겸직하게 된 60년 이후였다. 이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물론 빨리 공부를 마치려는 계획에서 볼 때는 조금 먼 길을 돌아가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60년도 넘은 미국 현지 교회에서 청빙을 받은 일도, 교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도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일이었고, 제대로 해 보겠다는 의욕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61년부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 흑인 학생들의 인권 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남부의 인종분리 정책에 맞서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남부를 돌며 시위한 ‘프리덤 라이드’ 운동이 이때 시작됐다. 운동의 중심은 기독교인들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흑인들은 불매운동, 연좌농성, 준법투쟁 등으로 인종차별의 부당성을 알려 나갔다. 그 중심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다. 킹 목사와의 만남은 나를, 나의 삶의 목표를 가장 크게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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