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18)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손 잡고 “우리 승리하리”

[역경의 열매] 이승만 (18)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손 잡고 “우리 승리하리” 기사의 사진

루이빌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에서 시무하며 루이빌 대학교 교목으로 일하던 1960년 어느 날, 내가 교목실에 있는데 흑인 학생 대표가 찾아왔다. 당시 미국은 흑백분리정책으로 흑인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대학이 많았으나 우리 학교에는 5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흑인 인권운동의 바람은 우리 학교에도 불어와 있었다.

“교수님, 흑인 학생회를 새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학생자치기관으로 등록하려면 지도교수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교수님께서 맡아 주십시오.”

흑인 교수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교수들이 선뜻 나서지 않자 나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비교적 흑인 학생들을 잘 이해하는 편이라는 평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학생의 간곡한 요청에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꺼리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와 학교 일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나날이었다.

“대신 약속해 줄 것이 있네. 앞으로 흑인 학생회가 무슨 일을 결정하든지 반드시 나에게 와서 먼저 상의해 줬으면 하는 것이네.”

학생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이 일은 곧 내 삶에 회오리를 몰고 왔다. 당시 흑인 인권운동은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시위대의 당면한 목표는 루이빌 시의회가 흑인들에 대한 공공시설 출입금지 조례를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흑인들이 적어도 호텔이나 식당 같은 공공시설이라도 출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양심적인 교수들과 백인 학생들도 가담하면서 경찰들과 대치하고 시민들과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나는 지도교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처음에는 “내가 꼭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경찰의 진압이 강경하고, 시민들의 야유와 욕설이 하도 심해 잔뜩 위축되기도 했다. 심지어 계란과 콜라병이 날아와 학생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시위가 연일 계속되면서 경찰 진압에 부상당하거나 구속되는 학생 수가 늘어나자 백인 시민들의 양심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도 학생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수록 지극히 정당하고 기본적인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이 출입하는 식당에 발만 들여도 매를 맞고 쫓겨나는 학생들. 그런 부당한 대우에 직면할 때마다 학생들의 눈망울에 번지곤 했던 슬픔들이 내 일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슬퍼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나마 권리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나도 힘을 보태주고 싶어졌다.

어느 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루이빌에 왔다.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를 보기 위해 흑인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킹 목사는 연단에 올라 조용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로 연설했다.

“용서는 얻어맞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복을 할지, 용서를 해줄지는 가해자의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불신과 의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자는 것입니다.”

연설이 끝나고 시위대는 가두행진을 했다. 킹 목사의 손을 잡고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이 순간이 내 삶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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