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19) 흑인 인권운동에서 깨친 ‘화해자의 사명’

[역경의 열매] 이승만 (19) 흑인 인권운동에서 깨친 ‘화해자의 사명’ 기사의 사진

“일제 36년간의 억압과 차별도 뼈에 사무치게 분했는데, 400년이 넘는 흑인들의 무참한 역사를 미국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1960년대 초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흑인들의 이주 역사와 그들이 처한 법적, 현실적 환경에 대해 공부하게 됐다. 알면 알수록 그 현실은 참혹하고 심각했다. 특히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한 나로서는 그들이 당하고 있는 이중 삼중의 차별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흑인들에 대한 공공시설 출입금지 조례를 철폐하라”고 외치며 뜨거운 도로 위에서 시위를 계속해 나가던 1963년 여름, 드디어 조례가 폐지됐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작은 벽을 넘었을 뿐이지만 큰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시위를 응원하고 언론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 준 몇몇 백인들, 그들을 통해 시민의식이 살아있음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나 개인에게도 이 시기는 중요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통해 ‘화해자’의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킹 목사의 연설은 첫째로 내가 가지고 있던 ‘피해 의식’을 다른 의미로 승화시켜줬다.

일제하 기독교에 대한 핍박, 아버지의 순교, 6·25전쟁, 가족과의 이별, 피란 등을 겪으며 나는 내내 “왜 나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하나”라는 울분으로 떨어야 했다. 미국에 와서도 그 분노는 그대로 응어리져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서 때때로 ‘용서’에 대해 설교하면서도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꿰뚫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과 북한 공산당,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와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핍박받고 차별받았던 흑인들 속에서 함께 싸우면서 “왜 나만”이라는 의문이 풀렸다. 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가해자인 백인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라고 말하는 킹 목사와, 이를 지지하는 흑인들을 바라보며 “무엇 때문에”라는 물음도 해답을 얻었다.

내가 고난을 받은 것은 바로 ‘화해’를 위해서였다. 화해자의 값진 자격을 얻기 위해서 먼저 피해자가 된 것이었다. 목사가 된 이유도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였지만 진짜 사명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삶의 실마리가 풀렸다. 또한 당시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한 흑인 인권운동을 가까이서 목도하면서 나는 희망을 품었다. 더딜지라도 열심히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사회 전체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당시 나에 대한 학교와 학생들 양쪽의 신뢰는 점점 커져 갔다. 조례 철폐 이후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고, 때때로 과격해져서 학교 건물을 점거하는 일도 생겼는데,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과 대화에 나설 수 있는 교수는 나밖에 없었다. 대학 총장이 나서도 승복하지 않던 학생들은 고맙게도 내가 하는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 줬다. 나도 자연히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고, 그들의 요구를 최대한 학교 측에 전달하려고 애썼다. 이는 내가 흑백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덕이기도 했다.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처럼 ‘중간자’가 꼭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이때 내가 품었던 변화에 대한 희망은 아직 덜 여문 것이었다는 사실을, 1963년 11월 큰 사건을 겪은 뒤 깨달았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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