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4) 떨리는 마음으로 북한의 가족 생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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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부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로 일한 기간, 나는 낮에는 중동지역을 위해, 밤에는 한국을 위해 일했다. 당시 한국 정치상황은 수렁에 빠진 상태였다. 한국의 지식인과 언론들이 탄압을 받을수록 해외에서의 조국 민주화에 대한 관심은 강하게 피어올랐다. 내 사무실은 자연스레 재미 지식인과 학자들의 민주화운동 본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77년 카터 대통령이 당선돼 부임한 직후에는 백악관과 한국대사관 앞에서 죄수복을 입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규탄하기 위해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벌인 시위였다.

중동지역 총무로 일하면서는 세계적으로 화해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78년 이집트 교회 선교 125주년 행사를 위해 카이로에 갔을 때 사다트 대통령을 만난 일을 잊을 수 없다. 대통령은 미국 교회 대표들을 집무실로 초청해 73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에도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집트는 10여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점점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없는 보복을 가져올 뿐입니다. 국민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와 같은 평화주의에 감명을 받아 “저희 조국도 분단돼 있습니다. 다음 평화협정은 한반도에서 이뤄지도록 협력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사다트는 “화해를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듬해 반대파의 테러로 피살됐다.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화해란 항상 이렇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인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역시 78년 카이로에 머물 때였다. 미국 선교사 한 분과 저녁식사를 하는데 북에 두고 온 가족 얘기가 나왔다. 선교사는 “카이로에 북한 대사관이 있는데 가족의 생사를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는 외국에서 북한 주민과 접촉하기만 해도 친북으로 몰리는 시대였으므로 “위험한 일입니다”라고만 답했다. 그러나 실은 ‘정말 살아만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오랜 대화 끝에 북한 대사관에 찾아가기로 했다. 선교사가 미리 전화로 방문 신청을 해줬다.

다음날 북한 대사관에 찾아갔지만 다리가 굳어지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죽기 전에 어머니와 동생 소식을 한 번은 듣고 싶다’는 진한 감정이 대사관문을 벌컥 열게 만들었다.

대사관 직원에게 내가 살았던 평양 주소와 가족 이름을 적어 주며 생사 확인을 부탁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저희 아버님께서 목회하실 때 강량욱 목사라는 분과 교분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 분과 같은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라고 했다.

직원 눈이 커지면서 “강량욱 부주석과 선생의 부모가 아는 사이란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강 목사님이 부주석인 것을 몰랐기에 내심 놀랐으나 맞다고 대답했다.

대사관을 나오는데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떨렸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숙소로 돌아갔다. 대사관에서 다시 오라고 한 날까지의 사흘이 30년처럼 길었다. “정말 살아 있을까? 폭격으로 다 죽었을까?”

사흘 뒤, 다시 북한 대사관에 찾아갔다. 창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이 오더니 말했다. “동생 분들께 연락이 왔습니다. 모두 살아 있답니다.”

“예? 그것이 정말입니까?” 눈물이 쏟아져서 주체를 못하고 있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강 부주석께서 이 선생을 초청하셨습니다. 직접 들어와서 가족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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