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손영옥] 한국의 부자, 미국의 부자 기사의 사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세금을 더 내겠단다. 미국 백만장자 45명이 지난달 중순 성명을 내 “우리에겐 소득세를 깎아주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까지 “나 같은 부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거들었다.

대한민국에선 낯선 이 풍경은 수년 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좌파’ 노무현 정부의 최대 치적 종합부동산세(종부세)는 도입 초기 저항이 거셌다. 한국 부자들 사이에선 ‘징벌적 세금’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당시 주무부처 재정경제부의 이헌재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종부세를 낼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부(富)로써 성공한 사람들의 자긍심과 사회적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호소해 반발을 비껴가려는 전략이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수장이 바뀌어 한덕수 장관 시절에야 도입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종부세는 정권이 바뀌면서 너무도 신속히 손질됐다. “(바뀌기 힘든)헌법 같은 법을 만들었다”는 비장했던 탄생 과정이 ‘개그콘서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우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종부세의 핵심인 부부 합산과세는 폐지됐다. 과세 기준은 공시지가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상향됐다. 세율도 인하됐다. 부동산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만든 종부세는 그래서 유명무실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도 사정이 비슷해 보인다. ‘글로벌 투톱 기부 전도사’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과 워런 버핏 회장이 올 8월 중국으로 기부문화 전도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억만장자 보유 국가다. 하지만 부자들의 반발은 의외로 거셌고, 게이츠와 버핏 주최 만찬엔 초청자 3분의 1이 오지 않았다. 괜히 갔다가 기부를 강요당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성장에 대한 열망이 지배하는 개도국에서 부자들의 정서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부세를 후퇴시킨 대한민국, 이곳 집권당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소득세 및 법인세 감세 공약을 재검토키로 한 것이다. 밑바닥 서민정서가 심상찮다는 걸 눈치 챈 게다.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원칙은 세우는 것)’를 대선후보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측에서조차 소득세 감세 철회 기조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보수의 좌향좌는 글로벌 현상으로도 읽힌다. 영국 보수당의 젊은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이 중도 색채를 가미해 당수를 거머쥐고 정권 교체를 이룬 게 대표적인 예다. 그는 부자들을 위한 상속세 기준 금액 상향조정을 포기하는 대신 저소득층 소득세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자본주의 꽃인 금융에 대한 규제에 앞장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파의 변신 배경엔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성찰과 그 위기가 낳은 참혹한 현실이 있다. 약육강식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왼쪽 날개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노동자는 희생을 강요당했다. 개발경제학에선 경제가 도약하기 위해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임노동, 즉 노동 착취의 불가피성을 학문도 ‘인정’하는 것이다. 11월 13일은 전태일 분신 40주기였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외치며 그가 산화한 지 40년이 흘렀다.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나라는 세계 15위(2009년 기준) 경제대국이 됐다.

경제가 궤도에 오른 지금, 양보는 이제 부자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기부문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중국에서 이를 솔선하는 천광뱌오(陳光標) 장쑤(江蘇)성 황푸재생자원이용유한공사 회장의 변은 그 이유를 웅변한다. “기부는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니까요.”

성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빈부 격차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그 간극을 메우려면 빈자(貧者)를 배려하는 부자(富者)가 필요하다. 한국 부자들이 내 소득세를 깎아주지 말아 달라고 성명서를 내는 뉴스를 기대하는 건 너무 먼 꿈일까.

손영옥선임기자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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