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5) “아! 오마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역경의 열매] 이승만 (25) “아! 오마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기사의 사진

1978년 이집트 카이로에 미국장로교총회 선교부 총무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나는 북한대사관으로부터 북한 방문 초청을 받았다. 가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뜻밖의 제안에 나는 놀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며칠 뒤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호텔로 돌아와 나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혹시 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 번갈아 엄습했다.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나는 침대 옆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하나님!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것처럼 매달리고 매달렸다. 동이 트자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오늘까지 생명을 지켜 주신 하나님이 북한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대사관에 가서 “강 부주석의 초청에 응하겠다”고 했다. 대사관 직원은 “1주일 후 동독대사관으로 오시면 평양까지 안내하겠습니다”라고 했다.

1주일간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고 카이로를 떠나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의 동독대사관에 도착했다. 카이로의 그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경유해 평양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무를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을 떠난 비행기는 광활한 러시아 땅을 가로질러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모스크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8년 만에 고향 땅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돼 잠도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뉴욕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숨겨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30분 후에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합니다.” 안내방송에 손에는 벌써 땀이 흥건했다. 착륙하고 보니 공무원들이 마중 나온 가운데 저 멀리 꽃다발을 든 여인이 보였다. 동생 경옥이었다. 50년 열 살이었던 소녀가 중년 부인이 돼 있었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큰 누이동생 경신이까지 우리 셋은 서로 끌어안고 대합실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오마니는, 오마니는 살아 계시네?” “오빠, 오마니는 오빠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다가 7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뭐라고? 오마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오마니!”

세 남매는 한 시간도 넘게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안내원과 직원들도 아무 말 않고 기다려 줬다. 나머지 두 동생도 호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헤어질 때 생후 6개월이었던 막내는 “오마니께 귀가 닳도록 들어 오빠가 낯설지 않아요” 했다. 밤새 얘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집 떠난 두 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무릎 꿇고 울며 기도하셨다고 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승규도 사업가로 성공해서 남쪽에서 잘 살고 있디. 나는 미국에서 목사가 됐고….” 내가 들려주는 소식에 동생들은 28년 전 소녀 시절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다음 날에는 누이들과 평양 시내를 관광했고, 3일째에 나를 초청해 준 강량욱 부주석을 만나 북한 교회의 형편을 자세히 물어봤다. “강 목사님, 저희 아버님 뒤를 이어 저도 목사가 됐습니다. 이곳에 교회가 재건되기를 바랍니다.” “이 목사, 나도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해 보겠네.”

후에 평양에 봉수교회가 세워진 것은 강 목사님의 힘이 컸다. 그리고 본래 법관이었던 그 아들 강영섭 목사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에 올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나는 이때 북한을 방문한 일을 한동안 가족 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