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6) 방북 후 ‘친북’ 딱지… 한국 방문도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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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북한을 방문해 여동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나는 2년이 되도록 아내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함께 피란을 나왔던 남동생 승규에게만큼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사업하는 데 누가 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이 얘기를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80년 11월 미국 북장로교회 교단잡지 등에 북한 방문기를 기고하면서였다. 이후 내내 나에게는 ‘친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이때 이후로 나에게는 ‘남북통일의 가교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나서는 데 대해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특히 통일을 강조하면 “평양에 갔다 와서 물든 거 아닙니까?”라는 말이 나왔다.

“통일은 성경적으로 하면 화해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힘으로 얻는 통일은 또 다른 분노와 보복만 가져올 뿐 온전한 평화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화해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화해목회’ 철학에 대해 수긍하고 내 편이 돼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단지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빨갱이’ ‘좌파’로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가슴이 아팠다. 심지어 오래 인권운동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서조차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80년 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의 내 직책이 중동 담당에서 아시아 담당으로 바뀌었다. 이제 구체적으로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위치가 됐다는 데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다.

그런데 설렘을 안고 도착한 김포공항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안기부에서 내 입국을 막은 것이다. 안기부에서 나온 직원은 내가 아무리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대표 자격으로 왔다”고 설명해도 내가 북에 다녀온 사실과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사실들만 되풀이해 말했다.

자칫하면 경찰에 연행돼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 안위도 문제였지만 미국 북장로교의 파트너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는 이만저만 걱정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총무였던 김윤식 목사님이 안기부에 연락해 “내가 그분 신분을 보장하고, 만일 염려하는 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대신 들어가겠소”라고 호소한 끝에 겨우 입국이 허락됐다.

이 일로 나는 김 목사님을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됐다. 당시 한국에서 친북과 용공으로 낙인찍히면 얼마나 어렵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 살아가면서도 상대의 ‘진심’을 알아보고 그에 합당하게 대우하려는 자세에 탄복한 것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후에 미국교회협의회(NCCUSA) 회장 취임 때 김 목사님을 초청해 설교를 부탁드리기도 했다.

한국 방문 때 해직교수와 민주화운동 관련 구속자 및 가족들을 많이 만났다. 또 이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목회자들과도 대화했다. 그러던 중 “내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미국에 돌아간 나는 즉시 미국 장로교 각 노회를 다니며 호소했다. “한국의 양심적 학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한 노회에서 한 명의 체류비와 학비를 맡아 주신다면 그들이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김찬국 한완상 이만열 박창해 등 여러 교수와 지식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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