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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승만 (28) 클린턴에 “北핵, 무력으론 해결 안된다” 설득

[역경의 열매] 이승만 (28) 클린턴에 “北핵, 무력으론 해결 안된다” 설득 기사의 사진

1997년 교단 내 보수적 색채의 신문 ‘레이맨’(Layman)이 “이승만 목사의 화해 목회는 실상 북한의 앞잡이 노릇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실은 뒤 총회에는 내 직책의 적절성을 놓고 찬반 논란이 격렬히 벌어졌다. 그러나 73년부터 나를 봐 온 총회 동료와 목회자들은 나를 변호해 줬다.

나도 가장 심하게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리고 장시간 대화하고 설득했다. 그런 끝에 몇몇은 오해를 풀었고, 도리어 나를 믿어 주고 지지해 주는 교회는 더 늘어났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 내 한국계와 흑인 간의 갈등 해결을 위해 한 일들이다. 92년 4월 28일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났다.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의 약탈에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한인 이민자들이 애꿎은 피해자가 됐다. 미국 언론은 폭동을 한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당시 미국교회협의회장이었던 나는 폭동 직후 LA에 구호대책반을 파견했다. 나도 직접 구호반을 인솔해 LA로 갔다. 폭동 당시 총에 맞아 사망한 이재성군의 장례식이 열렸다. LA지역 한인 대표들이 거의 참석했다. 미국 주요 언론들도 취재를 위해 모여 들었다. 나는 미국 언론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의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가졌던 꿈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평등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려는 꿈, 그 꿈이 실현되도록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LA지역 흑인과 한인 교회 대표들을 만나 한·흑 갈등 해소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마라톤 회의를 며칠간 진행했다.

93년 3월 24일에는 미국교회협 대표단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 당시는 제1차 북핵 위기로 미국과 북한 간의 힘겨루기가 한창이었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군 폭격이 임박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미국교회협이 10여년간 한반도 통일과 화해를 위해 애써 온 과정을 전하며 “북한을 다룰 때 군사력이나 전쟁과 같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다시 한 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한국 민족은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게 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미국이 떠안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답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다뤄 보겠습니다. 대신 교회협의회는 미국의 경제와 국제 문제를 위해 힘써 기도해 주십시오.”

이 일로 대통령은 나를 백악관 종교자문위원으로 공식 임명했다. 그 후 미국과 북한은 경수로 제공 대가로 핵을 포기하는 ‘제네바 합의서’에 공동 서명했다.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당시로서는 평화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백악관 종교자문으로서 주로 한 일은 흑인과 한인간의 화합운동이었다. 각 도시에 흑인·한인 협력위원회를 만들었고 흑인 지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한국을 소개하기도 했다.

94년 미국교회협 대표단과 함께 로마 교황청을 방문, 요한 바오로 2세와 면담했을 때도 나는 어김없이 한반도 이슈를 꺼냈다. 내가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교황께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달라”고 하자, 교황은 “한반도의 어려운 문제들이 속히 제거되고 그 땅에 화해와 평화가 곧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미국교회협의회장직을 마치고 95년을 맞았다. 나는 다시 미국장로교 선교부 부총무 일에 매진했다. 이때 ‘이번에는 남북한 교회 대표들을 미국으로 부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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