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재열] 지친 한국인에게 여가를 기사의 사진

“여가는 스마트한 기업이나 정부라면 마땅히 고민해야할 생산적 과제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으로 그 권리를 대변코자 했던 평화시장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그 시대 개발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한 정주영 회장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졸린 눈을 부릅뜨고 바늘에 몇 차례 찔리면서도 각성제를 먹어가며 일했던 미싱사들과, 새벽 3시 반부터 하루를 시작했던 정 회장은 축적한 부의 크기에서는 양극단으로 갈렸지만, 각자의 직업에서 세계 최장시간 일을 했다는 점에서는 닮은꼴이었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는 이런 땀과 눈물의 시간이 배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여전히 세계 1위의 장시간 노동국가다. 연간 평균 2256시간을 일하는 한국인은 OECD 평균보다 492시간, 그리고 가장 적게 일하는 네덜란드 사람들보다는 무려 867시간이나 더 많이 일하고 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고3의 특징’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5.4시간에 불과하고, 아침밥을 못 먹는 학생이 거의 3분의 1이나 된다고 하니, 중·고등학생의 공부시간도 세계 최고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래 일한다고 생산성도 높은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5달러로 OECD 평균인 42달러의 절반을 조금 넘고, 미국인의 55달러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장시간 노동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피폐하게 한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연간 2000명을 넘고, 그 피해자는 연간 10만명을 넘으니 국제적으로도 민망한 수치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OECD 최저,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통계청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0 국민여가생활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의 여가시간은 평일 4시간, 휴일 7시간 정도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TV시청이나 낮잠과 같은 소극적 활동에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휴식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부가가치가 높은 창조경제로 이행하는 이 시점에서 노동집약 산업화시기의 상징인 장시간 노동체제는 더 이상 덕목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노동인력의 여가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정책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줄어드는 1인당 근로시간만큼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이미 법제화되어 있는 주 40시간 근무제를 철저히 지키고 법정 휴가일수를 모두 쓰게만 해도, 어림잡아 40만∼50만명 분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청년실업의 문제에 이보다 더 좋은 대책도 없다. 더구나 짧아진 노동시간만큼 그 생산성을 높이면 금상첨화다.

둘째, 근로시간 단축에 보태 다양한 파트타임과 유연한 근무시간제를 도입하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일터와 가정의 공존을 더 쉽게 하여 가정 친화적인 직장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여성의 출산과 육아를 더 쉽게 하여 저출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셋째,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여가활동은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 장기체류 관광이나 레포츠 활동 참여 등을 촉진하여 관련 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고,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할 것이다. 첨단 제조업보다도 서비스업의 고용효과가 훨씬 높다는 데 주목하자.

넷째, 적극적인 여가활동이 많아질수록 시민들은 가족이나 직장의 범위를 벗어나 다양한 동호회 활동이나 자원봉사 참여 등으로 사회성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퍼트남이 설파한 바와 같이 풀뿌리 민주주의는 ‘함께 볼링치기’ 같은 적극적이고 사회적인 여가활동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인 여의도 정치나, ‘우리가 남이가’로 뭉친 연고주의를 넘어서는 풍부한 시민사회의 토양을 살찌울 수 있다.

여가는 더 이상 ‘노는 것’에 불과한 소비적 활동이 아니다. 높은 생산성과 삶의 질, 그리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바라는 스마트한 기업이나 정부라면 마땅히 고민해야 할 중요한 ‘생산적 과제’가 되었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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