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경미] 애기봉 성탄 트리와 미루나무 기사의 사진

시인이란 핑계로 어떤 단어에 속속들이 예민해질 때가 있는가 하면 멋대로 그 뜻을 속단해 버리고는 그걸로 그만일 때도 있다. 애기봉은 후자였다. 갓난아기에 얽힌 사연 때문에 애기봉인가보다 짐작하고는 끝이었다. 한번도 그 생각을 의심하거나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만한 흥미가 없었다고 해야 맞겠다.

어렸을 때부터 성탄절 무렵이면 으레 등장하던 애기봉과 북녘 땅이란 단어들은 고백건대 내겐 ‘전쟁’이나 ‘실향’이란 말처럼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 것들이었다. 나는 ‘민족’과 같은 거시적 단어에의 생생한 존재 동일시가 불가능한 전후세대의 한 좀스런 개인일 뿐이었던 거다.

그런데 이번의 애기봉은 좀 다르다. 애기봉의 ‘애기’가 갓난아기의 ‘아기’가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 평양감사와 사랑에 빠진 기생 ‘애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몇 십년 만에 알게 돼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애기봉 트리도 재점등됐는데 내 집 거실에선 올해 따라 크리스마스트리 자체가 아예 사라져서도 아니다. 지난해까지도 12월이 시작되면 늘 트리를 거실 한켠에 장식해 두곤 했다. 그랬던 트리가 너무 크고 낡은 듯해서 작은 걸 새로 마련할 요량으로 작년 이사 때 버리고 왔었다. 그런데 올해 12월에는 그거 하나 살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다. 어쩌다 늦은 밤까지 글을 쓰다가 어두운 거실에 나가 앉아 바라보던 꼬마전구들의 명멸이 꽤 좋았는데 이번엔 그럴 수 없게 된 거다. 좀 허전했다.

사랑과 평화의 점화도구

하지만 전쟁이라도 나면 그 허전함이 다 뭐겠는가. 바로 그거다. 이번의 애기봉의 트리 점등식 뉴스에선 갑자기 전쟁이나 피난이란 단어들이 현실로 속속들이 가깝게 다가왔다. 연평도의 상황이 당장 내 눈앞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무 과장 없이 생생했다. 나의 여기와 지금이 그렇게 절실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문득 성냥공장 한쪽에 잔뜩 쌓인 미루나무들이 떠오른다. 성냥개비는 미루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미국에서 온 버드나무라고 해서 미류나무라고도 불렸던, 우리에게는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 있네” 하는 동요가 익숙한 나무다. 그 커다란 미루나무를 수천, 수만 개로 쪼개고 쪼개서 끝에 유황을 묻힌 게 성냥인 거다. 한 그루의 미루나무는 수천, 수만 개의 성냥 불빛을 품고 있는 셈이다.

애기봉의 크리스마스트리도 그 미루나무와 같지 않을까. 성냥은 이제 사양 품목이어서 남은 성냥공장도 경상도 어딘가의 딱 한 곳뿐이란다. 그러나 성냥불의 위력과 위험도는 아직 여전히 크다. 가장 기쁜 날, 케이크의 초에 불을 붙이는 더없이 큰 설렘과 따뜻함의 축하와 기념의 점화도구가 되는가하면 때론 산을 모조리 태우거나 주유소 하나를 완전히 폭발시키는 대형화재의 발화점이 되고는 한다.

온 산하에 은총의 빛 퍼지길

애기봉의 트리가 그제 점화됐다. 해발 155m의 산 위에서 믿는 자들의 합창 속에서 7년 만에 불을 밝혔다. 이 트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온 산야를 비출 것이다. 트리에 매달린 꼬마전구들에는 하나하나 우리 국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불과 1.5㎞ 떨어진 북녘 주민들을 배고픔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간절하고도 순수한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꼬마전구들이 그들에게 따뜻한 성냥 불빛들이기를, 결코 그들을 자극하는 위험천만의 발화점이 아니기를 소원한다.

실은 그들만도 아니다. 그 불빛이 상승과 가벼움에의 속도전에 찌든 우리 쪽의 가난한 마음들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애기봉을 밝히는 트리가 성탄의 메시지를 가득 담아 우리 민족 사랑과 구원의 빛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이윽고 반도의 평화와 통일에의 무성한 미루나무 한 그루가 되기를 거듭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경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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