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영미] 교사 폭행의 심리 기사의 사진

얼마 전 학부모가 교사를 때리고 맷값을 제안했다고 해서 떠들썩했다. 한 교원단체에 접수된 사례인데, 교복치마가 짧다는 지적을 받은 여학생의 부모가 교사 얼굴을 치고 수표를 내밀었다고 했다. 재벌2세 ‘맷값폭행’의 학교편이라 할 만하다. 수표 덕에 눈길을 끌긴 했지만, 요즘 학교에서 학부모의 교사 폭행은 놀랍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일이 됐다. 전학을 권고한 담임교사를 때렸다는 아버지, 머리 길이를 지적하는 교사에게 달려들었다는 부부, 아들 뺨을 때린 교사에게 골프채를 휘둘렀다는 부정까지 기억나는 것만 여럿이다.

사건의 반전은 ‘을’이 ‘갑’을 때렸다는 데 있다. 맞은 건 교문 안에서 아이 일에 전권을 가진 교사들이다. 정규교육을 받은, 이성을 가진 학부모라면 교사를 때린 뒤 닥칠 현실적, 도덕적 후폭풍을 짐작할 것이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때까지, 아이는 ‘폭행 부모의 자녀’라는 꼬리표를 매단 채 살아야 한다. 단언컨대, 내 아이의 교사란 화난다고 쉽게 다툴 수 있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교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그 순간, 그 부모 마음속에 오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충동질한 것, 다시 말해 두뇌회로에 일종의 심리적 누전(漏電)을 유발한 것은 대체 뭘까.

교육심리학 서적들을 뒤적이다 부모 자녀 갈등을 칼 구스타브 융의 그림자이론으로 분석한 주장을 발견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그림자의 형태로 내면 깊숙이 잠복해 있다가 성년이 된 뒤 자녀에게 ‘투사’된다는 것이다. 만약 어린이 A가 당근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맞았다고 해보자. 엄마가 된 A는 야채를 안 먹는 자녀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낼 확률이 높다. 성년의 A를 지배한 자아는 당근 때문에 혼나던 어린이다.

1960∼80년대, 지금의 학부모들이 보낸 학창시절은 어느 모로 보나 낭만을 논하기 어려웠다. 대학입시는 지금만큼 괴로웠고, 학교는 지금보다 더 군대 내무반 같았다. 대걸레 자루로, 출석부로, 손바닥으로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그 시절, 일생 가장 유용한 교훈도 얻었다. 공부 잘하면(혹은 돈 있으면) 안 맞는다는 불변의 법칙이다. 그들의 10대는 고마웠던 선생님에 대한 추억만큼이나 폭력교사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짐작해본다. 학부모의 주먹이 교사를 향해 올라가는 그 순간, 그 학부모의 심리를 점령한 건 융이 말한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아들 뺨을 때린 교사를 폭행한 아버지의 내면에는 학창시절 악몽이 켜켜이 쌓여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 골프채 든 이는 중년의 사내가 아니라 교련시간에 야구방망이로 얻어맞던 30여 년 전의 10대였을 것이다. 자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교사를 목격한 순간, 어느 부모의 의식은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리던 고교시절로 돌아갔을 수 있다.

동의한다. 어떤 이유로도, 교사 폭행은 정당화될 수 없다. 주먹은 교사가 맞았지만 다친 건 교사 개인이 아니다. 교사를 향한 폭력은 근대의 학교제도가 어렵게 도달한 어떤 경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신뢰, 믿음, 합의. 교사의 자존심과 함께 그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 기괴한 폭력은 꼬리를 문 폭력의 일부분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학부모가 교사를, 교사가 학생을, 학생이 교사를 때리는 폭력의 무한반복 속에 갇혀 있다. 맞았다고 더 세게 때린다면 모두가 쓰러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건 부탁에 가까울 터인데, 첫발은 교사가 떼길 바란다. 학부모도, 학생도 함께 다짐하고 실천하는 사회적 파워가 되기는 어렵다.

누군가의 선생님이 되겠다고 나섰을 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야심 차고 영리하고 선량했을 것이다. 출발선에서 대한민국 교사는 세계 최고의 엘리트집단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1769년 프랑스 교육기관 콜레주의 학칙은 ‘체벌은 영혼을 손상시킬 뿐 아무 것도 교정하지 못한다’고 적었다(‘아동의 탄생’). 체벌금지에 대한 교단의 합의와 노력이 단절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

이영미 특집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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