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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배병우] ‘통큰 기업’은 없나

[데스크시각-배병우] ‘통큰 기업’은 없나 기사의 사진

코스피 주가가 2000선을 훌쩍 넘어섰다. 올해 상장기업 매출총액은 사상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선다고 한다. 영업이익 총액도 90조원 이상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송년회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불안하다”고 한다.

대기업 경기와 서민 체감경기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지 오래고, 증시가 ‘외국인과 기관의 리그’가 됐음을 잘 아는 데도 올 연말은 유독 썰렁하게 느껴진다. 대기업과 금융사 부장급이 태반인 친구들과 송년회에서 나눈 대화를 생각하니 불안의 단서가 잡힐 듯하다. 그동안 단골 얘깃거리였던 우리 기업의 너무 이른 퇴직 관행에다 올해는 하나가 더해졌다. 기업형슈퍼마켓(SSM)과 ‘통큰 치킨’이다. “구조조정이 상시적으로 진행되고 50대 초반이면 회사를 떠나는 데, 대기업이 자영업까지 눈독 들이면 뭘 해 먹고 사느냐”는 거다. 대기업의 ‘서민형 업종’ 진출 러시는 올 겨울 가장들의 꿈자리까지 뒤숭숭하게 하는 공포다.

문제는 내년엔 이 흐름이 더욱 거세질 거라는 점이다. 대상그룹과 웅진이 학원사업에 본격 진출할 계획이고, 일부는 공구유통업, 가구업, 장의업까지 할 모양이다. 야채가게, 문방구, 슈퍼마켓, 집단급식업, 음식점 등은 대기업이 차린 유통업체나 프랜차이즈의 태풍에 휘말린 지 오래다.

대기업의 영세자영업 진출이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혀 소비자 후생을 높이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재 서민 살림살이의 위태함과 열악한 일자리 사정을 보노라면 여기에 동의하기가 영 망설여진다. 자영업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계층 갈등이 전면화하는 것을 막아 온 ‘완충지대’였다. 구조조정 칼부림에 밀려난 직장인의 가장 손쉬운 선택이 음식료업과 소매업이었다. 이 완충지대가 있었기에 평생고용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난 기업들이 수익극대화만을 향해 질주할 수 있었다. 주주의 이익이 경영의 모든 것이라는 주주자본주의가 이를 뒷받침했다. 한국 기업들의 눈부신 실적 뒤에는 언제라도 인력을 해고할 수 있는 상시 구조조정 시스템이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반면, 꾸준히 유입되는 해고자와 청년실업으로 자영업은 극심한 경쟁이 벌어지는 레드오션이 됐다. 총취업자의 30%가 넘는 570여만 명이 몸담고 있지만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 혜택도 없다. 창업과 전업을 위한 정부 지원도 쥐꼬리만하다. 망할 경우 대부분이 임시 일용직으로 전락해 도시빈민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과 양질의 인력, 규모의 경제를 모두 갖춘 대기업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소비자 후생을 우선해 대기업의 진출을 무제한 허용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즉 경쟁에서 밀려나는 영세상인들의 임시 생계유지, 전직 훈련비 등이 먼저 논의돼야 한다. 이 비용은 결국 국민들이 내는 소득세나 기업의 법인세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다. 업종 진출 제한을 폐지해 소비자 후생을 높이자면서 이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에 대해선 일언반구 않는 건 무책임하고 불공정하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대기업의 배신이라는 부분도 짚지 않을 수 없다.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들의 상당수는 1970∼80년대 산업정책에 따라 정책적으로 육성된 기업이다. 삼성에 뿌리를 둔 CJ와 신세계, LG에서 갈라져 나온 GS, 그리고 롯데그룹 등이다. 이들은 수십 년간 파격적인 저금리의 정책금융과 세금 감면 등 막대한 특혜를 받았다. 정부와 국민이 베푼 특혜는 이들 기업이 세계로 진출해 국부를 벌어들이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끈 달린’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투는 국민들과 맺었던 암묵적인 사회계약의 파기요, 배신행위로 볼 수 있다.

새해에는 진정한 ‘통큰 기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중소기업과 영세업자들이 성숙시킨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과실을 챙기지 않으며, 고용창출이 기업의 본분임을 잊지 않는 기업 말이다.

배병우 경제부장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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