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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김용백] ‘희망’을 쏘다

[데스크시각-김용백] ‘희망’을 쏘다 기사의 사진

싸움에서, 상대편 상징을 제거하는 효과는 매우 크다. 그래서 그런 일이나 그리 하고픈 욕구는 시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지난 8일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 쇼핑센터 앞에서 발생한 권총 난사사건은 그런 차원의 일인 것 같다. 19명의 안타까운 희생자들이 있지만.

미 민주당과 정치권은 총탄을 맞아 중태인 민주당 소속 가브리엘 기퍼즈(40) 연방 하원의원을 차세대 주자이자 ‘떠오르는 별’(a rising star)로 평가하는 터였다. 공화당에서조차도 그를 ‘똑똑한 에너자이저 토끼’(the Energiger rabbit with a brain)라고 인정했다.

미국민이 9·11테러의 아픔을 딛고 희망을 키우는 상징인 크리스티나 테일러 그린(9)양도 쓰러졌다. 그린양은 미국 정부가 각 주(州)에서 2001년 9·11테러 당일 태어난 아기 1명씩을 뽑은 ‘희망의 얼굴’ 프로젝트에 포함된 아이였다.

미국의 상징들을 쓰러뜨린 이 사건은 미국 정치·사회적 현실을 상징한다. 총기 소지가 합법화된 미국에선 총기사건으로 해마다 3만여명씩 숨진다. 총기 소지에 관대한 애리조나주에서 총기사건 발생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뒤 미국은 급격한 변화 속에 있다. 버락 오바마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정권이 보수의 공화당에서 진보의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민주당 정권은 건보개혁법안, 이민법안, 금융규제법안 등 개혁 법안들을 밀어붙이며 공화당과 첨예하게 충돌했다.

지난해 11·2 미국 중간선거는 피 터지는 싸움판이었다. 보수와 진보가 돈을 쏟아부은 네거티브 선거운동이 극에 달했다. 보수성향 유권자 단체 ‘티파티’는 기퍼즈 의원 등 민주당 후보 20명의 살생부를 작성했다. 이들의 선거구를 총구표적으로 표기한 지도도 만들었다. 기퍼즈와 백중세였던 티파티 후보 제시 캘리는 선거운동 때 “제시 캘리로 장탄된 M-16 자동소총으로 (기퍼즈를)쏘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였다. 민주당 개혁 정책들에 열성이었던 기퍼즈가 가까스로 승리했다.

중간선거 결과는 민주당이 참패해 공화당에 하원을 내주는 동거체제 정부로 귀결됐다. 이후 최근의 백악관 인사 개편까지를 보면 민주당이 공화당에 확연히 밀린다는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선 ‘승자 독식’의 탐욕이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딱 그 시점에 기퍼즈 의원이 쓰러졌다. 20대 용의자는 총탄 31발을 쏘고도 다시 탄창을 갈아 끼우려 했다니 그의 적개심은 끔찍하다.

지금 미국에선 정치권의 ‘거친 표현’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고, 정치권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보수 세력과 공화당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 그렇게 헐뜯고 죽음을 운위하던 공화당과 민주당이 금세 뭘 도출할지 궁금해진다. 정치역학이란 게 일방으로만 작용하지 않아서다.

사람을 죽이는 정치가 어디 한두 나라에 국한되는 일이던가. 한국 사회도 ‘증오의 정치’ ‘막말 정치’엔 이골이 났다.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쓸어버리고” “죽여 버려야” 등등의 거친 표현은 이제 충격적이지도 않다. 우리 정치권에선 복지 포퓰리즘 논쟁이 뜨겁다. 2012년 총선·대선을 의식한 여야가 배수진을 친 채 공방을 벌이고 있다. 고령화 시대에 복지국가 비전을 떠들면서도 보수적 정책과 진보적 정책은 평행선을 달린다. 상생이 아닌 상대를 죽일 듯한 대립으로, 함께 잘 살자는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길도 있을까?

정치적 학습 효과는 국민의 사고와 정서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이번 미국 사건이 웅변한다. “독설은 표현의 자유일 수 있지만 그 대가가 따른다”는 애리조나주 한 보안관의 말이 고개를 주억이게 한다. 기퍼즈 의원은 사건 발생 전날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중도정치 발전 방법, 어조(rhetoric) 및 당파성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고민하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희망’을 향한 노력은 시작되고 있었다.

김용백 국제부장 yb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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