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통치가 아닌 정치를 할 때다 기사의 사진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운을 자랑하던 초패왕 항우(項羽)가 해하에서 한고조 유방(劉邦)의 군대에 포위당해 전의를 상실한 것은 적국 한(漢)의 노래를 듣고서가 아니었다. 자기 나라 초(楚)의 노래를 듣고서였다. 항우는 성 밖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사면초가 四面楚歌)를 듣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초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초나라 모두가 한나라에 떨어진 모양이라며 마지막을 준비한다.

여당서 들려오는 야당 노래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 낙마 사태를 겪으면서 잠시 사면초가라는 고사를 떠올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나라당 최고위원회는 지난주 정 후보자가 감사원장으로서 부적격자라며 사퇴를 압박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고위 공직 후보자를 여당이 낙마시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적진에서 적의 노래가 들려오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편이 적과 한통속이 돼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노래를 부르는 격이 됐으니 이 대통령으로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느낌일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청와대로부터 한나라당에 요즘 날씨만큼이나 매섭게 찬바람이 불고 있다. 홍상표 홍보수석은 “여당도 인사에 대해 의사표시를 할 수 있지만 그 절차와 방식은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한나라당을 비난했다. 한나라당이 정 후보자의 거취에 관해 청와대와 사전 조율 없이 부적격 결론을 내리고 일방 발표와 청와대 통보를 함으로써 뒤통수를 맞은 데 대한 극도의 불쾌감 표시였다.

청와대는 또 오는 26일로 잡혀 있던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 만찬을 바쁘다는 이유로 취소해버렸다. 일부 신문은 청와대 한 참모의 말을 인용, 이 대통령이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딱 한 사람, 안상수 대표에게만 감정이 있다고 보도했다. 안 대표가 보온병 포탄 해프닝, 여성 비하 발언 등으로 실추된 이미지 만회를 위해 이번 일을 주도했고, 여당의 대표로서 청와대와의 사전 조율 등 필요한 절차를 무시했다는 불만이다.

아군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청와대로서야 자신들의 잘잘못을 떠나 이 정도의 유감 표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도 정권 4년차를 맞아 레임덕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마당에 여당의 반란에 쥐죽은 듯 있을 순 없었을 것이다. “딱 한 사람에 대한 유감” 운운도 사면초가 땐 한쪽만 공격해 탈출구를 마련하듯, 타깃을 극도로 좁혀 반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 효과를 발휘하여 레임덕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더 험한 꼴에도 대비해야

그러나 이 대통령이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단임제 하에서의 레임덕 현상은 정권이 출범하는 날부터 시작되고 임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그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때의 경험을 말하지만 그때는 그가 현직이었던 서울시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권력의 유력한 후보였다. 이번 일도 그렇고,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일부 언론까지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레임덕과 관련이 없지 않다는 건 기자만의 억측인지 모르겠다. 한나라당 내 친이계 인사들이 친박계에도 발을 걸치는 이중 계보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권력이라는 게 그런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선거에 불리한 데도 정의나 의리 때문에 순장(殉葬)당할 정치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경우에 따라선 시간이 흐를수록 더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도 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감정을 해소하고 여야와 소통하되 우선 여당부터 빨리 추슬러야 한다. 여당으로부터 민심의 동향도 수렴하고, 필요한 일은 설득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여러 차례 브레이크가 걸려 낭패를 본 경험이 있지만, 앞으로는 “내가 옳으니 나를 따르라”는 식의 국정 운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통치가 아닌 정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항우의 얘기로 시작했으니 항우의 얘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항우가 패망의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하늘만 원망했으니 이 어찌 잘못이 아닌가”라고 나무랐다.

백화종 부사장 wjba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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