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개헌 제대로 하기 기사의 사진

이재오 특임장관의 개헌 불 지피기가 별 효과를 못 낸다고 판단했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3일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들에게 직접 ‘개헌논의’를 주문하고 나섰다.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이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사에 인용된 이 대통령의 언급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현행 헌법은 만들어진 지 30년(실제로는 23년여)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21세기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둘째 권력구조 같은 문제만 논의하지 말고 헌법 조문 전체에 걸쳐 시대와 상황의 변화를 반영시켜야 한다. 추측하건대 이 대통령의 인식은 이런 것 같다. ‘낡은 후진국형 헌법을 선진국형 헌법으로 바꾸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 권력구조만 바꾸자 해서는 안 되겠지만 역시 핵심 과제는 그것이다.’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현장에서 직접 들은 말이 아닌 만큼 이 정도도 제법 잘 독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구조 배제한 논의라면

이 대통령은 “국회와 여당이 단순히 권력구조 논란에 붙잡혀 자신들의 유·불리만 따져 가며 논의를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논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력구조 변경을 포함시키되 그 점에는 너무 관심을 갖지 말고 다른 부분들을 고치는 데 신경 쓰면 개헌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말이겠다. 대단히 난해한 화법이다. 정치인에게나 국민에게나 ‘개헌=권력구조 변경’은 상식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이보다 더 민감한 사항도 달리 없다. 대통령이라고 이를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 붙잡히지 말라고 한다. 얼핏 그럴듯한 해법 같지만 따져 말하자면 억지다. 이 문제가 정리되지 않을 경우 개헌 논의는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게 정치권의 개헌논의 구조다. 차라리 “거대여당이면서 왜 개헌을 국회의 의제로 삼지 못하느냐”고 압박하는 게 훨씬 정직한 주문이다.

청와대 측의 말은 다르다. 대통령이 개헌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로 한 말이란다. 자신은 반대하지 않으니까 논의를 하든 안 하든 당이 알아서 조속히 매듭지으라는 뜻이었다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밝혔다는 뉴스가 있었다. 갈수록 퍼즐게임에 말려드는 기분이다. 찬성도 반대도 않는다면 굳이 이것저것 언급하며 주문성 의견 제시를 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 한마디의 파급력’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했을 것이다. 충분히 전파됐다고 판단한 다음의 발 빼기 전략은 혹시 아닌가?

성안과정은 민간에 맡겨야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최근 “18대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하자고 한 것은 모든 정당이 약속한 것”이라며 이 특임장관의 개헌 행보를 거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가 끝날 무렵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을 집요하게 요구한 바 있다. 대선 일정에 쫓기던 각 정당들은 ‘국회의 돌계단에서라도 개헌 발의를 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압박에 눌려 ‘18대 국회에서의 개헌 논의’를 약속하고 함께 서명했다. 안 대표의 ‘약속’이란 바로 그것이다. 그 상황을 지금 여당의 대표가 개헌논의 당위성의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란 참….

개헌을 아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하되 권력구조 변경은 배제하고 다른 문제들, 이를테면 기본권, 환경, 경제, 남북관계, 특히 국회 및 정당 관련 조항들의 선진화를 시도하면 된다. 그럴 때는 국민도 진정성을 이해해 줄 것이다.

또 하나의 주문 사항은 ‘정치인 배제’다. 정치적 과제에 정치인을 참여시키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우리 정치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절박하기까지 한 과제다. 헌법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중요한 정치 헌장이며 선언이다. 국회에 이 논의를 맡기면 그 결과는 보나마나다. 우선 싸우느라 개헌안 성안 자체가 어려울 것이고, 설령 그게 된다고 해도 정당과 정치인의 집단이기주의가 고스란히 배어든 법안이 되기 십상이다. 꼭 개헌을 해야 하겠다면 민간의 전문가들로 개헌 기구를 구성하고 국회는 이에 대한 추인권만 갖도록 하는 게 옳다. 그러기 싫으면 개헌론은 다시 접어둘 일이다.

이진곤 논설고문 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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