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설날 단상 기사의 사진

올 설에도 어김없이 그 후배가 엿을 보내왔다. 자기 집에서 직접 고아 만든 것이라면서. 철 따라, 전국에서 제일 먼저 수확한 것이라며 쌀도 보내주곤 하는 고마운 후배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후배가 보내오는 엿은 그때마다 기자에게 가슴 시린 추억과 그리움도 함께 가져다준다. 18년 전 유력 정치인의 부인이 아들을 대학에 부정 입학시킨 의혹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기자가 이 난에서 짧게 소개한 삽화가 있다. 그 삽화를 모를 독자들을 위해 다시 옮겨본다.

엿이 불러온 그리움

“어머니가 장에 가던 날. 어머니는 울며 따라나서는 아이를 엿 사다 주마며 겨우 달래 떼놓았다. 어머니는 약속대로 엿 한가락을 사들고 집을 향했다. 뱃속에 든 아이의 동생 때문이었을까. 휘적휘적 20리길을 걷는데 보따리 속의 엿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그 유혹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울며 보채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엿장수가 모두 죽었는지 오늘 장엔 없더라고 거짓말을 했다. 새끼 것을 빼앗아 먹었다는 죄책감에 입술을 깨문 어머니는 그 후 차마 엿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아이가 커서 장가가던 날, 어머니는 새 며느리가 가져온 폐백상자 속의 엿을 보며 ‘엿이구나’를 신음처럼 뱉어냈다.”

그때는 아들의 부정 입학 의혹으로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를 변호하기 위해 우리 어머니들의 평균적 모습이라며 이 삽화를 그렸지만 사실은 기자 자신의 어머니 얘기다. 후배가 보내준 엿이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시린 추억과 그리움을 불러오는 까닭이다.

이처럼 기자는 설 선물로 받은 엿으로 남다른 감회에 젖지만, 설이 되면 비록 엿에 얽힌 사연이 아니더라도 기자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 어렵게 살던 시절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설이 됐는데도 자식들에게 변변한 설빔을 마련해주지 못한 게 무슨 큰 죄인 양 젖은 눈으로 자식들을 쳐다보던 어머니의 그 모습이. 나는 설빔이 없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기자는 가끔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렵게 산 세대일수록 부모 자식 간, 동기간의 정은 더 두텁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본다. 부모는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 못한 게 마냥 빚진 죄인인 심정이었고, 자식들은 거꾸로 속이 안 좋다며 자신은 굶으면서 자식들만 먹이는 부모가 언제나 가슴 먹먹해지는 대상이었다. 동기간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서로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으로만 바라보던 부모 자식 간, 동기간에 정이 두터워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물질적 풍요, 정신적 빈곤

반면에,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부모 자식 간, 동기간의 정이 예전 세대와 같지 않다는 느낌이다. 기자가 오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되 물질적인 풍요가 거꾸로 마음을 메마르게 만드는 것 같다. 부모는 웬만하면 자식들에게 입는 것, 먹는 것을 남부럽지 않게 해주는 건 물론이고 고액 과외까지 시켜준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빚졌다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 게 없다. 내가 너한테 안 해준 게 뭐가 있어 왜 그 모양이냐고 타박이다.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부모가 남달리 고생한 것도 아니고, 남보다 특별히 잘 해준 것도 없으면서 무슨 생색이냐고 불만이다. 가족들 간에 특별히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생각이 자리할 여지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정이 깊어질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눈물이라는 게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갈라진 틈을 메워주는 효능을 가졌다는 내용의 에세이를 읽었다. 정말 그렇다고 느꼈다. 우리 세대는 부모의, 동기간의 젖은 눈가장자리를 수도 없이 보고 자랐다. 그만큼 서로 간에 측은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부모의, 동기간의 젖은 눈가장자리를 볼 기회가 적다. 그래선지 마음이 메말라가고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도 나이 든 세대 같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끼니를 걱정하던 보릿고개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만큼 마음도 넉넉해지고 정도 깊어지면 좋으련만. 설 명절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 한 구석이 시리고 스산하다.

백화종 부사장 wjba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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