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명희] 인플레 전쟁 승자는? 기사의 사진

500년 조선왕조사에서 영·정조시대는 태평성대로 꼽힌다. 특히 정조는 경제개혁 조치를 통해 폭등하는 서울 물가를 잡고 생활필수품 품귀 사태를 해결해 민생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조는 집권 15년차인 1791년 좌의정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폈다. 국가의 필수품을 공급하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 판매권을 없애고 개인 상인의 자유로운 상거래 행위를 보장했다. 백성들은 물가 안정으로 어느 때보다 편안한 삶을 누렸다.

고려 6대 왕인 성종 때는 ‘상평창’이란 곡식창고를 만들어 물가를 조절했다. 풍년이 들어 곡물 가격이 떨어지면 곡물을 비싼 값으로 사들여 떨어진 곡식 가격을 올리고, 반대로 흉년이 들어 곡식 가격이 크게 오르면 국가가 비축해 두었던 곡물을 풀어 가격을 낮춰 민초들의 시름을 덜어줬다.

과거 역대 정권마다 물가는 최고 통치권자의 숙제였다. 물가가 오르면 월급이 올라도 실제 손에 쥐는 돈이 줄어 민심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학의 대가 J M 케인즈도 V I 레닌의 말에 동조하며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그 어떤 수단보다 더 교묘하고 확실하게 현 사회의 근간을 전복시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높은 실업률과 물가 폭등이 튀니지와 이집트 시위 사태를 촉발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민심을 잡는 데 물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최근 신흥국들이 겪는 인플레는 미국이 경기를 살리기 위해 대량으로 달러를 푼 영향이 크다. 기상이변으로 작황이 안 좋은 데다 미국에서 풀린 돈들이 투기자금으로 흘러들어가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해 밀려드는 달러를 막기 위해 환율전쟁을 치렀던 신흥국들이 이번엔 인플레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신흥국들에서 ‘패닉 바잉(panic buying·공포에 가까운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전 세계 각국이 치솟는 곡물 가격과 늘어나는 바이오 연료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아프리카 경작지 확보를 위한 ‘랜드 러시(land rush)’에 돌입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연초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각 부처가 물가 잡기에 달려들었다. ‘경제계의 검찰’ 공정거래위원회는 ‘물가위원회’란 비아냥까지 감수하며 물가와의 전쟁에 선봉장으로 나섰다. 공정위가 담합 여부를 가리기 위해 원가를 들여다보겠다고 하자 기업들은 70년대식 물가 통제가 다시 시작됐다며 아우성이다. 정유사들은 국제유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데다 유가에서 차지하는 세금 비중이 절반에 달해 기름값을 내릴 여지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도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에 이어 지난 1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도 이 대통령이 “대기업들이 조금 협조해야 한다”며 지목하자 좌불안석이다. 통신업체도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인 ‘통신비 인하 카드’가 또 등장하자 불만이다.

정부는 업체들에 으름장을 놓는 수밖에 없어 고민이다. 거시정책 수단인 금리 인상은 770조원을 넘는 가계부채를 고려하면 ‘시한폭탄’이 될 수 있어 함부로 쓸 카드가 아니다. 그렇다고 수출 기업들의 수익을 깎아먹는 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을 무작정 용인하기도 녹록지 않다.

연간 5% 성장과 3% 물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던 정부의 올해 목표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미국이 푼 돈으로 미국 경기는 ‘더블딥(경기가 상승했다가 다시 침체되는 것)’ 우려를 딛고 강한 회복세를 보이며 5% 성장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푼 돈 때문에 물가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인플레 현상이 지속되면 구매력이 떨어져 5% 성장도 담보하기 힘들다. 인플레 전쟁을 계기로 정권마다 되풀이돼 온 기업들의 독과점과 유통 구조를 확 뜯어고치겠다는 정부 의지가 먹혀들지, 기업들이 이번에도 폭우를 피해갈지 두고 볼 일이다.

이명희 경제부 차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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