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엄상익]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기사의 사진

“진정한 크리스천은 말 속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할 수 있다”

지난해 늦가을 부산에서 세코마루라는 배를 타고 규슈 남단의 모지항으로 건너갔다.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덩이에 갇혀 죽음을 눈앞에 둔 선교사가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고. 그만이 아니다. 그를 따라 크리스천이 됐다가 배교한 일본인 신자도 원망을 한다. 하나님은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 배신자가 되게 하시느냐고.

그 답을 찾고 싶어 순교한 일본인들의 성지를 찾는 색깔 있는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일본인 순교자의 넋이 깃든 니시오카 공원을 갔을 때였다. 한국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커다란 소리로 통성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여 이 암흑의 영혼이 지배하는 땅, 우상이 가득한 땅, 전 국민의 0.8%밖에 크리스천이 없는 땅을 구원하소서.”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해일같이 주변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한국교인들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믿음만이 제일이고 우리 교회가 최고이고 우리 목사님 외에는 없다는 보수적 배타주의의 종교적 교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바지를 입고 노란 모자를 쓴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을 왔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국교인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교회에서 온 한 여자는 그 유치원 아이들을 보면서 이 겨울에 돈이 없어 반바지를 입으니 얼마나 불쌍하냐고 혀를 찼다. 이건 아니었다.

일본에 교회는 별로 없지만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가정에서 찬송하고 성경을 읽는 모임은 많다고 했다. 믿음이 퍼지는 방식이 조용한 것 같았다. 도쿄에서 죽음의 장소까지 800㎞의 길을 끌려가던 성도들이 머물던 소노키 마을은 햇빛에 반짝거리는 바닷가, 평화로운 어촌이었다. 일본의 순교자들은 조용히 끌려가 말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인 유노하라 목사를 만났다. 나가사키의 외곽에서 가건물 이층을 빌려 초미니 교회를 하고 있었다. 열 평 정도의 예배당에 접이식 철의자 열 개정도가 놓여있었다. 흰 벽 한가운데 십자가가 걸려있고 그 앞에 놓인 작은 강대상이 전부였다.

사십대의 유노하라 목사는 7년 전 교회를 시작했다. 처음 일 년간은 신도가 한 명도 없었다. 아침 4시면 일어나 혼자 새벽기도를 했다. 첫 신자는 노숙인이었다. 매주 노숙인 한 명을 앞에 앉혀놓고 주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설교만 시작하면 노숙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교회를 그만둘까 하는 회의가 일었다.

그는 낮에는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회를 유지했다. 헌금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7년을 버틴 끝에 지금은 신자가 20명으로 늘었다. 유노하라 목사는 너무 기뻐 이제는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진다고 고백했다. 그 목사는 공원에서 소리치던 한국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향해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죄해야 할 게 있습니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전쟁으로 한국 사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게 일본의 수치입니다. 문화재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유노하라 목사는 그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상의 잘못에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면서 참회하는 태도였다. 우리라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일본에서 26년간 선교활동을 했다는 구원준 목사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미움과 열등의식이 진정한 사랑과 용서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유노하라 목사가 계속했다. “우리는 똑같은 피부색을 하고 가까이 살면서도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하나님 아래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 않나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작지만 깊은 일본인 교회의 모습이었다. 일본 크리스천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는 말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그의 말 속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할 수 있다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말이라도 소리 나는 구리고 울리는 꽹과리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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