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오종석] 한국판 ‘양산저우’는 기사의 사진

중국에서 범국가적으로 ‘양산저우(楊善洲) 따라 배우기’가 한창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양산저우야말로 공산당원과 간부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이라고 규정했다.

후 주석은 전국 당원간부들에게 ‘양산저우 동지 따라 배우기’를 특별 지시했다.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과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등 다른 최고지도자들도 당 간부들에게 양산저우를 모델로 삼으라고 독려했다. 리위안차오(李源潮) 당 중앙조직부장은 전·현직 공직자들에게 양산저우의 교훈을 배우라고 주문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관영 신화통신 등 주요 언론은 연일 최고지도자들의 관련 발언과 함께 양산저우의 행적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양산저우는 1951년부터 35년간 윈난(雲南)성 바오산(保山)시에서 평범한 지방 공직자로 근무했다. 바오산시의 최고위직인 당서기까지 역임하다 61세인 1986년 퇴직했다. 공직에 있을 때 그의 검소한 생활과 인민을 위한 헌신적인 업무 처리는 다른 공직자들의 귀감이 됐다. 지역주민들도 그의 퇴직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공직자로 인정받고 13억 중국인이 따라 배워야 할 영웅으로 떠오른 건 정작 퇴직 이후 행적 때문이다.

양산저우는 퇴직 후 보통의 공직자들이 선택하는 편안한 연금생활을 거부했다. 그는 도시에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고향인 스뎬(施甸)현 다량산(大亮山)에서 ‘제2 공직의 길’을 시작했다. 산기슭에 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다량산 삼림농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어릴 적 울창했던 이 산이 벌목 등으로 민둥산이 됐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걸 막아보자는 일념에서였다.

그가 당시 국가로부터 받은 유일한 대우는 겨우 월 70∼100위안(1만7000원)의 식비보조금뿐이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가며 매일 나무를 심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던 지역 촌민들도 하나둘씩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량산을 둘러싼 촌민 상당수가 참여하면서 이후 20여년간 무려 7만 묘(畝:중국 토지면적 단위, 1묘=666.7㎡)에 나무를 심었다.

그의 노력은 2010년 윈난성을 비롯한 남부지방에 최악의 가뭄이 닥쳤을 때 빛을 발했다. 다른 대다수 지역은 물 부족으로 곤경에 처했지만 다량산 주변 지역은 산림 덕분에 산에서 샘물을 구할 수 있어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퇴직 공직자 1명이 실천한 20여년간의 솔선수범과 현장 지도력의 결과물이었다. 지난해 가뭄 때 한 촌민은 “양산저우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양산저우가 퇴직 후 귀향한 계기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시 최고위층인 서기로 있을 당시 고향사람들이 수시로 그를 찾아와 고향을 위해 이런 저런 일을 부탁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그는 그러나 “내가 시의 서기인데 어떻게 내 고향만 챙길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퇴직 후 꼭 고향을 찾아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고향을 찾았다. 2006년부터는 인근에 목재 가공공장도 들어섰고, 이후 2008년까지 고향 마을은 목재 제공 등으로 36만 위안(6100여만원)의 공동수익금을 마련하게 됐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농장을 2009년 4월 정부에 헌납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타계 직전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도저히 일할 힘이 없어서 삼림농장을 국가에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직자로서) 퇴직한 게 아니다. 계속 인민대중을 돕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퇴직 공직자들 대부분이 연금으로 편안한 여생을 보낸다. 일부 고위 공직자들은 재임 시절 영향력 등으로 산하 단체 기관장이나 임원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공직사회 기강이 해이해진 한국사회에서 ‘한국판 양산저우’를 찾을 수 있을까.

베이징=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