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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남호철] ‘기네스 도전’과 혈세

[데스크시각-남호철] ‘기네스 도전’과 혈세 기사의 사진

세계 최고기록만을 모은 책이 ‘기네스북’이다. 매년 영국에서 발행된다. 이 책의 발행은 1954년 우연한 논쟁에서 비롯됐다. 물떼새의 일종인 ‘골든 플로버’가 유럽에서 가장 빠른 새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후 이 책에 진기록으로 등재되려는 도전이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놀랄 만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에게는 찬사와 탄성이 이어졌다. 어이없는 신기록이나 맹목적인 도전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세기 들어 지방자치단체 사이에는 기네스 도전이 유행병처럼 번졌다. 기네스북에 등재되면 세간의 이목을 받을 수 있어 지자체로서는 홍보에 더없이 좋은 호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행태는 혀를 차게 만든다. 지난달 24일 국내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A기록원’ 대표가 사기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영국 ‘기네스 세계 레코드’와 대행사 계약을 맺지 않은 채 국내 공식 대행사 행세를 하며 거액의 로고 사용료를 가로챘다는 이유에서다.

이 사건 이면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안일한 행정이 있었다. 2001년 ‘인증서 남발’을 이유로 한국기네스협회가 해산된 뒤 국내에는 공식 대행사가 없어 기네스 등재를 원할 경우 누구나 직접 신청하면 된다. 그럼에도 지자체들은 비공식 대행사에 심사와 등록비 등의 명목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산을 퍼부었다. 기네스북 심사·등록비 800만원의 수십배를 ‘과감히’ 내놓은 곳도 있었다.

부산 사하구는 분수를 내세웠다. 총면적 3519㎡에 지름 60m, 둘레 180m, 최대 분사 높이 55m의 분수는 2009년 ‘세계 최대 바닥분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번역비, 통역비, 출장교통비 등 갖가지 명목으로 4배 이상 부풀려진 3600만원이 새나갔다.

지자체들이 축제를 열면서 이벤트성 행사로 만든 ‘세계 최고’ 가운데에는 무용지물이 됐거나 심지어 골칫거리로 전락한 것들도 있다.

충북 괴산군은 2005년 세계 최대 가마솥을 만들었다. 지름 5.7m, 높이 2.2m, 둘레 17.9m, 무게 43.5t으로 솥뚜껑을 열려면 기중기를 동원해야 할 정도다. 제작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비용은 예상보다 3배까지 불어났다. 군민성금 5억원 정도가 들었다. 하지만 단체장이 바뀌면서 4년째 방치되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게다가 기네스북 인정도 못 받고 무용지물로 남게 됐다. 지역홍보와 주민통합을 위한다고 하지만 보여주기에 급급한 전시행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울산 울주군은 무게 172㎏, 옹기 전 둘레 214㎝, 최대높이 246㎝, 최대둘레 520㎝, 바닥둘레 283.3㎝ 규모의 세계 최대 옹기를 만들었다. 5차례나 제작에 실패한 뒤 6번 도전 끝에 성공했다. 제작과정에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 9000여만원을 들여 기네스 등록을 추진하던 중 비공식 대행업체 A기록원 대표가 구속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래도 기네스 등록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황당한 사연을 안고 있는 ‘도전’도 있었다. 광주 광산군은 높이 7m, 가로 3m, 둘레 12m, 무게 6t의 ‘세계 최대’ 우체통을 만들었다. 4000만원을 들여 기네스 인증도 받았다. 하지만 이 우체통은 지역의 정체성과는 아무 상관없이 울산 울주군이 간절곶 우체통으로 기네스 인증 절차를 밟다가 포기하자 다른 지역과 겹치지 않는 사업을 찾다가 만들어졌다. 오직 기네스 등재만을 위해 예산만 낭비한 셈이다.

단체장들이 선거에서 표를 의식해 내실보다는 세계 최대·최고 등 단시간에 성과를 내려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내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주민들의 부담으로 전가될 게 뻔한데도.

굳이 기네스북이 아니더라도 ‘최대 혈세 절약’ 등의 기록으로 주민들로부터 최고를 인정받는 단체장이 필요할 듯하다. 그러면 주민들의 마음은 저절로 그 단체장에게 기울어질 것이다.

남호철 사회2부장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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