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조성기] 생활 속에서 맑게 증류된 언어들 기사의 사진

어느 학형이 시집 한두 권이 될 만한 두툼한 원고를 보내왔다.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동창일 뿐 아니라 문학회 활동도 함께했던 문우이기도 하다. 그와 나는 그동안 신상명세서나 이력서 친구란에 서로의 이름을 적어 왔다. 훤칠한 키와 잘 생긴 용모로 나에게 신체적 열등감을 안겨주기도 하고 공부와 문학, 여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은근한 경쟁심을 품게 하기도 했다.

전문인에게 귀감 될 詩語

학창시절 그의 시들은 대개 좀 어려운 관념어들의 조합으로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수십 년이 지나 다시 그의 시들을 대하니 연륜과 함께 관조의 깊이가 느껴지면서 언어들이 자못 부드러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 모가 나고 거친 돌들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깎여 매끄러운 자갈돌이 된 듯 여겨졌다. 그만큼 갈등도 많았고 내적 투쟁도 많았으리라 짐작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는 시의 시작(詩作) 메모를 보니 ‘시라고 볼 수 없으나 나의 결혼기념일에 잠깐 써놓은 글’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런데 ‘잠깐 써놓은 글’이 그 원고뭉치에서 단연 눈에 띄는 시로 돋보였다. 정식으로 시인이라는 명칭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잠깐 써놓기만 해도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인가 싶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허물 없는 출발을 하는 것이다/언제 어디서이든/좋은 출발지점을 발견하는 것이다//내가 사랑하는 것은 명랑하게 길을 가는 것이다/내가 선택한 길에서/내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가장 고운 노래를 때때로 부르며/어떤 상황에서든/헤쳐 나가는 것이다//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끝을 만나는 것이다/처음 생각하던 마지막 안식처를/처음과 다름없는 수더분함으로 도달하고/모두에게 감사하며 눈을 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활 속에서 묵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맑게 증류되는 언어들이 시가 아니겠는가. 원고 전체를 살펴보니 좀 복잡한 가정사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섭리, 변호사 생활과 인권투쟁 시절을 거치면서 인생과 사회에 대해 갖게 된 단상들이 들어 있었다.

또한 고치고 싶은 악습과 내밀한 욕정들과의 씨름, 깨끗한 양심과 순전한 내면에 대한 갈증, 자연에서 얻는 평온함, 신과 죽음에 대한 묵상들까지 그 시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폭과 깊이에 있어 만만하지가 않았다.

뜻있는 출판사가 출간하길

그는 시집 제목을 ‘겨울 푸른 하늘’로 잡고 있었는데, 피의자나 죄수를 접견하러 간 구치소와 교도소 담장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다른 곳에서보다 유난히 푸르게 보인다고 했다.

“화두이옵니까/구름티 한점 없는 밝은 얼굴로/촘촘히 박힌 높다란 건물의 이마와 티끌 같은 생존의 도회지를 둘러싼 먼 산자락의 어깨를/한꺼번에 짚어주시고/어제도 그제도 오늘도/겨울 푸른 하늘(중략)”

그는 1980년 모 대학교에 근무하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 거리에 쏟아지던 피의 시내를 목격하고 인생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동안 미루고 있던 공부를 다시 하고 2년 남짓 만에 인권변호사로서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격변하는 시대의 물결에 떠밀리고 과중한 업무에 지치기 쉬운 세월이었는데도 끝까지 자기성찰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토록 많은 시편을 창작해내었다는 것은 법조계뿐 아니라 각계 전문인의 영역에서 귀감이 될 만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 학형처럼 시를 쓰는 법조인이 많이 나오면 그 분야도 좀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의 시 원고가 뜻있는 출판사를 만나 때에 맞게 출간되어 두루 읽혔으면 더욱 좋겠다.

조성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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