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민주정치에 월반은 없는가 기사의 사진

연초에 어느 기초지방의회 의원 한 사람이, 이름을 듣고도 자신을 몰라준다고 해서 공공근로 여성에게 패악을 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일이 채 잊히기도 전인 지난달에는 한 광역지방의회 의원이 동장을 험악하고 천박한 언사로 몰아세운 일이 기사화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치 경쟁이나 하듯 일전엔 기초지방의회 의원이 시청 간부를 상대로 폭언을 퍼부으며 폭력까지 휘두른 일로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여전히 ‘의원님’이다.

이들 대부분이 높은 학력이나 거창한 경력을 자랑하는 지역의 유지들이다. 이 멀쩡한 사람들이 의원 배지만 달면 이성을 잃어버리는(물론 일부의 경우이지만)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권력 허기증인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권력 과시증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고약한 증세다.

헐크를 닮아가는 의원들

호통과 완력 자랑으로 말하자면 국회의원들이야말로 프로다.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굽실거리며 앓는 소리를 한 게 억울해서인지, 이런저런 사람 국회에 불러 호통을 치고, 자주 자기들끼리 뒤엉켜 대 활극을 벌이기도 한다. 이들은 우리사회의 최상층 엘리트들이다. 그런데 너무 쉽게 ‘헐크’로 변신하곤 한다.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는 아니지만 바로 엊그제 국회외교통상통일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있었던 강기갑 의원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사이의 언쟁도 ‘헐크’화의 한 양상을 보여줬다. 물론 김 본부장이 잘못했다. 국회의원을 향해 “공부 좀 하고 이야기하십시오”라든가 “말씀 조심하십시오”라며 대든 것은 오만이 아니면 무분별이었다. 그러나 강 의원의 언행도 난형난제였다. 그는 시종 김 본부장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하대하는 말로 호통을 쳤다. 자료상의 나이는 오히려 강 의원이 한 살 아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공개석상에서 함부로 반말을 해서는 안 된다.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고 기본 예의다.

마침 어제가 4·19혁명 51주년이었다. 그때의 청년 학도들이 피를 흘려가며 독재에 맞섰던 뜻이 무엇이었을까. (틀림없이) 거대한 권력을 몰아내면 그 땅에 민주의 꽃이 만개하리라 믿어 목숨마저 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작은 권력들의 권세 자랑이 요란스럽다.

이 시간에도 나라 안 곳곳에서 재·보궐선거에 나선 후보와 정당들의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주자들은 저마다 해당 지역이나 나라의 장래를 자신들이 좌우할 수 있을 것처럼 거창한, 그래서 허풍스럽기까지 한 공약을 내걸고 표 구걸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들의 당선 이후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 멀미가 인다.

정치도 외주를 줘야 하나

한동안, 주로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에 의해 ‘국격’이 강조됐었다. 그래서 말인데 정치인들은 ‘국민격, 주민격’을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국민 혹은 주민의 대표라는 사람들의 언행이 시정잡배들로부터 ‘형님 대접’ 받을 정도로 거칠어질 때 국제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불문가지다. 온갖 예우와 보수를 주어가면서 국민이미지 훼손꾼을 만들어내는 격 아닌가.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이 전문 직업인인가 아니면 명예로운 봉사자인가를 명확히 구분해서 정의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명예와 봉사’를 망각한 대표들을 모시느니 아웃소싱을 하는 편이 낫다. 전문 기업이나 전문가 집단은 전문성에서 탁월할 뿐 아니라 고용주에게 공손할 줄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게 ‘민주정치에는 월반이 없다’는 사실이다. 4·19혁명 후 반세기가 더 지났는데도 아직 우리의 정치가 미숙성을 면하지 못한 게 그 증거다. 가능할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될듯하면서도 안 되고 마는 게 민주정의 월반이다.

그렇다고 지레 실망할 필요는 없다. 겸손해지고 진지해지면 월반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정치인들은 대단한 전문가나 되는 양하는 오만을 털어내고 초심으로 돌아갈 일이다. 선거 때 눈물을 흘리며 표를 호소하던 그때로! 민주혁명을 이뤄낸 선배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심을 품었던 그때로!

논설고문 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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