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칼럼] 국민가수와 문화대통령 기사의 사진

“서태지 팬들의 실망에 따른 일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결자해지의 역할 필요”

서울아시안게임이 막판으로 치닫던 1986년 10월초 청와대에서 한국선수단 숙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집 선수단장은 느닷없이 전화한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 선수들의 근황을 물으면서 임춘애 선수에게 ‘건강한 피’를 수혈해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매우 당혹스러웠다. 아시안게임 여자 육상 800m와 1500m에서 우승해 신데렐라로 떠오른 임춘애가 영양실조와 빈혈에 시달리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수혈을 해서라도 마지막 3000m결승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경기를 앞둔 선수에게 수혈한다고 해서 기량이 갑자기 좋아지는 게 아니고 임춘애가 빈혈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도 역시 근거가 불분명한 내용이라서 김 단장은 대통령에게 진땀 흘리며 전후 사정을 설명한 다음 긴 통화를 마쳤다고 한다.

무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전 대통령이 얼마나 스포츠 육성과 이를 통한 대내외 홍보에 열을 올렸는지 말해주는 일화다. 전 대통령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할 목적으로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체육계 인사들은 지금도 그를 ‘체육대통령’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전·현직 대통령 호칭에 체육 경제 문화 등 특정 분야를 넣는 것은 해당 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거나 두드러진 성과를 냈을 경우가 많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업적 또는 능력이 있을 때 대통령 아닌 인사에게도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한다. 전 대통령이 집권초기 고 김재익 경제수석 비서관에게 달아준 ‘경제대통령’ 칭호가 여기에 해당한다. 경제정책을 책임지라는 당부가 담긴 말이었다. 후임 대통령들은 직접 정책을 챙겨 스스로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기도 했으나 대부분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최근 비밀결혼과 이혼, 소송 사실이 드러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수 서태지에게는 ‘문화대통령’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녔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이런 호칭에 불만을 드러내는 인사가 적지 않지만 팬들이 그가 음악을 통해 끼친 사회적 변화와 영향력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단순히 노래를 히트시켜 출중한 가수로 인정을 받았다면 ‘국민가수’라는 애칭만으로 충분했겠으나 그는 기존 질서에 일대 변화를 몰아온 상징적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대통령의 호칭을 받았다.

북한 ‘인민배우’를 연상시키는 ‘국민배우’나 ‘국민가수’ 호칭은 다소 식상한 느낌이 없지 않다. 요즘에는 이름이 좀 알려졌다 싶으면 ‘국민’을 남발해 ‘국민여동생’이나 ‘국민엄마’ ‘국민아버지’ ‘국민할매’ ‘국민관광지’ 등이 속속 등장한다.

단순한 칭찬을 넘어 대통령 소리까지 들으려면 그만한 권위와 자질을 갖춰야 한다. ‘대통령’은 팬들의 생활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군림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스타에게도 보호해야 할 사생활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는 것과 왜곡하는 행위는 엄연히 다르다. 서태지는 15년 전 결혼 사실 보도를 명예훼손이라고 공격하고 팬들에게도 그동안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연막을 피웠다. 대중을 기만하고 언론을 압박해 진실을 호도하려는 행위는 어느 분야에서도 용인되기 어렵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에게는 임기가 있지만 ‘문화대통령’에게는 없으므로 그 위상 변화를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인기와 영향력을 보장할 수단이 없는 처지이므로 나름대로 위상을 유지할 방안이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렸고 완벽한 차단을 위해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베일이 걷혀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파장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팬들의 실망이 커지면서 공격적인 폭로가 꼬리를 물어 예기치 않은 피해로 번질 우려가 크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번지는 일대 혼란과 폭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결자해지의 역할이 요구된다. 진정 존경을 받는 대통령은 물러날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편집인 kimsongk@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