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선교통신] 이준 열사는 자살하지 않았다!

[유럽 선교통신] 이준 열사는 자살하지 않았다! 기사의 사진

하나님을 믿는 자가 자살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생명을 주신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는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고 믿기에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되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이준 열사를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곤혹스럽다.

네덜란드 출장길에 굳이 헤이그를 다시 찾은 것은 순전히 기독교인 이준에 대한 자살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어서였다. 격동의 시대, 선각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준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 드물었지만 오히려 그 영향력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절대적이었던 여명기였다.

일방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머나먼 길을 거쳐 헤이그까지 달려온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 3인방이 직면한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으로 회의장 입장도 못한 채 밖에서 배회해야 했던 설움이 얼마나 컸을까.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의 파티에 약소국 조선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헤이그 시내 드용호텔은 열강의 대표가 묵는 화려한 호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3류 여관급이다. 고종황제의 특사면 뭐하나…. 미개한 나라에서 온 일개 불청객에 불과한 이들이 느꼈을 열등감과 좌절이 얼마나 컸을지 능히 상상이 되었다. 1907년 7월 14일 각국 대표단이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의 파티를 즐기고 있던 그 시각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이자 열혈 애국자였던 이준은 쓸쓸히 호텔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신으로 침대 위에서 발견되었다.

어떠한 내상도 외상도 없는 이준의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이준의 사망소식을 본국으로 긴급타전한 일본 외교관이 자살했을 것이라고 추정 보고한 것이 유일한 자살설의 근거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되돌아가 이준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서 그와 대화하며 내게 주어진 확신은 울화병이었다. 회의장 밖에서 아무리 외쳐봤자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불과한 약소국 대표로서의 절망감과 울분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헤이그의 화려한 차이나타운 대문에서 직선거리에 있는 이준열사기념관은 초라했다. 찾는 이가 드물기에 문은 늘 굳게 닫혀 있고 벨을 누르면 관장이 내려와 문을 열어주는 시스템이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한국관광공사의 포스터는 도대체 언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빛이 바래서 차라리 흑백사진을 걸어두는 것이 나을 것 같을 정도…. 울화가 치민다.

이준 열사 일행이 묵었던 당시엔 1층에 카페가 있었고 2층부터는 객실이 있었던 호텔이었다고 하는데 그 후 이 자리에 당구장이 있다가 기념관이 들어선 뒤에는 대책 없이 방치상태로 흉물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천장도 벽도 물이 새는지 눅눅하고 곰팡이가 피어나고…. 입구에 붙어 있는 ‘이 집은 이준 열사가 순국하신 역사적인 집입니다’라는 문구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2층 입구에 있는 이준 열사의 흉상을 접하면 착잡하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말로만 순국열사라고 교과서에서 떠벌릴 뿐 실제로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예우도 못하며 살고 있다.

물이 넘쳐나는 홍수 때 오히려 마실 물이 귀한 것처럼 기독교인이 넘쳐나지만 도리어 진정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서일까. 예수쟁이 청년 검사로 살았지만 죽어서 오히려 말하는 이준의 외침이 가슴에 메아리친다.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제대로 죽으면 되레 영생하느니….”

서태원 (유로코트레이드앤트래블 대표,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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