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70) 칼이 잘라내야 할 것 기사의 사진

소나무 두 그루, 꼿꼿하건 휘건 보암보암이 잘났다. 조만하게 드리운 넝쿨이 자못 멋부린다. 허리 세우고 앉은 노인, 눈매가 예사내기 아니다. 시울이 올라가고 망울이 또렷하다. 터럭이 성깃해도 눈썹이 눈꺼풀을 덮고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날쌍하다. 넝쿨은 잠잠한데 수염은 가볍게 날린다.

뺨뼈가 솟고 콧등이 넓어 자칫 상돼 보여도 머리새와 미목, 구순에 선비 티가 완연한 관상이다. 초탈한 기색까지 넘보이는 이 노인은 누굴까. 그림 왼쪽 아래, 소나무에 기대놓은 칼자루가 있다. 칼을 든 선비라면, 당나라 여동빈이 분명하다. 결곡한 문인이자 검의 달인으로 추앙받은 여동빈은 불로불사의 신선 경지에 올랐다. 살아서 전설이 된 그는 조선 문인들의 최고 인기 아이콘이다. 깨끗하고 결연한 이미지 덕분이다.

여동빈은 모르는 이가 없어 개가 봐도 짖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내게 칼 세 자루가 있다. 하나는 번뇌를 끊고, 하나는 분노를 끊고, 하나는 색욕을 끊는다.” 한마디로 유혹을 물리치는 단호함이 그의 덕목이다. 칼은 예부터 지혜와 혜안을 상징한다. 모든 의혹을 잘라버리고 진리의 길을 여는 도구다. 문반 집안에 칼 한 자루씩 걸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삶이 불우해도 심지를 굽히지 않은 문인화가 이인상의 작품이다. ‘중국인의 검선도(劍仙圖)를 본떠서 취설옹에게 바친다’고 써놓았는데, 굳이 칼의 신선 여동빈을 그린 것은 자신의 심회가 심상찮은 까닭이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망상스런 세속에 붙들리지 않았고 매골이 말이 아닐 때도 자존을 지킨 그였다. 마구 휘두를 조자룡의 헌 칼이 아니다. 나의 미혹을 잘라낼 칼이다.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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