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명희] 고장 난 금융시스템 기사의 사진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90년대 국세청과 보험을 함께 담당하는 기자들은 ‘국보급’ 기자로 불렸다. 기사 출고량은 적은 반면 해외 출장 기회는 많아서다. 반대 경우도 있다. 1997년 당시 은행 출입기자들에겐 ‘시체 처리반’이란 별칭이 따라다녔다. 자고 나면 증권가에서 들려오는 기업들의 1차 부도 소식, 결국 어음을 막지 못해 그날을 못 넘기고 최종 부도 처리되는 기업들 기사를 써대야 했기 때문이다.

한보, 진로, 기아 등 간판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등(원화 가치는 하락) 금융시장은 요동을 쳤다. 그해 12월 2일 9개 종금사들이 영업정지를 당했다. ‘금융회사도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 국내 최초의 사건이었다. 올해 초 TV에서 예금자들이 돈을 찾기 위해 저축은행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선 광경을 보며 데자뷰(기시감·旣視感)를 느꼈다.

국민들은 더 이상 정부를 믿지 않는다. 지난 1월 삼화저축은행의 영업정지 때 “더 이상 영업정지는 없다”고 했지만 한 달 뒤 부산저축은행 등 2개 은행이 추가로 영업정지를 당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이번에도 “영업정지를 당하는 저축은행은 상반기 중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틀 뒤 예금인출 요구가 몰리면서 4개 은행이 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정부 말을 믿고 돈을 안 찾아간 사람들만 바보가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는 우량한 제일저축은행까지 예금인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고객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나서면 버틸 금융회사는 한 곳도 없다.

돈을 맡은 저축은행은 그 돈으로 온갖 투기를 하다 회사를 말아먹었다. 양파 껍질 까듯 드러나는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7개 영업정지 저축은행 대주주와 경영진의 비리는 일반인들에게도 분통 터지는 일이다. 하물며 파출부, 청소부로 일하고 시장에서 채소를 팔면서 평생 한푼 두푼 모은 알토란같은 재산을 날리게 된 피해자들은 오죽하랴.

피해자들을 두 번 뒤통수치는 건 금융당국이다. 금융감독원은 부실경영을 감독하기는커녕 불법을 덮어주고 ‘하수인’, ‘바람막이’ 노릇을 했다. 비리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수억원을 받아 챙겼고 그랜저 차량을 뇌물로 받거나 강남으로 이사한다고 손을 벌렸다. 수십억원대 보험 가입도 요구했다. 활약상도 눈부시다. 감사원이 감사 나간다는 정보를 미리 귀띔해주고 감사중점사항 대비요령을 알려주는가 하면 대출 알선 브로커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금감원 전 간부는 퇴직 후 매달 300만원씩 저축은행으로부터 월급을 받아 썼다. 금감원은 펄쩍 뛰지만 영업정지 전 VIP들의 예금 인출도 금감원의 영업정지 사전 정보 유출과 무관하지 않을 거란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금융강도원’ ‘금융비리원’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요즘 금감원 직원들은 택시를 타도 “여의도 금감원으로 가자”는 말을 못한단다.

민심에 편승한 국회는 더 가관이다. 다같이 약속한 금융시스템을 송두리째 흔들려 하고 있다. 5000만원까지인 예금보호대상을 이번에만 전액 보장해주고, 회사가 파산했을 때 가장 뒤늦게 보상해 주도록 된 후순위채권까지 보장해 주자는 법안을 냈다. 저금리시대에 한 푼이라도 이자를 더 받기 위해 저축은행에 돈을 맡겼다가 떼이게 된 부산 서민들을 위한 속 타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이건 아니다. 이번에 예외를 두면 다음엔 무슨 핑계로 막겠는가.

대한민국 금융시스템의 총체적 위기다.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신뢰회복이 먼저다. 내 돈을 금융회사에 맡기면 안전하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어야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금융회사로 들어가고, 그 돈이 기업과 개인으로 다시 흘러간다. 우량 금융회사로 돈이 몰리면서 금융회사의 옥석은 자연스레 가려진다. 금융감독 당국은 ‘금융검찰’답게 두 눈 부릅뜨고 시장을 감시해야 한다. 원칙과 믿음을 존중하는 사회, 고장 난 금융시스템을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이명희 경제부 차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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