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도 모르던 해적, 한국에서 인권을 맛보다… 아라이 국선변호인 권혁근 기사의 사진

권혁근: 나는 당신의 변호인이다. 당신 혐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마호메드 아라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정확히 모른다. 선박을 납치해서 잡혀왔다.

권혁근: 석해균 선장에게 총을 쏜 적이 있나.

아라이: 난 그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권혁근: 한국 해군의 진압작전 때 인질들을 인간방패로 사용했나. 당신은 총을 쏘며 저항했나.

아라이: 그런 적 없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만 기억한다. 선원들과 이야기한 적도 없다. 항복하려고 통신시설을 이용해 소말리아어로 항복방송을 했다.

지난 3월 15일 부산구치소에서 권혁근 변호사와 소말리아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21)의 첫 만남은 이런 대화로 시작됐다. 그의 말은 영어 통역과 소말리아어 통역을 거쳐 아라이에게 전달됐다. 당시 주어진 시간은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3시간.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했다가 잡혀온 해적은 5명인데 소말리아어 통역자는 2명뿐이어서 다른 해적 통역을 위해 그 이상의 시간이 할애되지 않았다.

2단계 통역을 거치다 보니 3시간 중 실제 대화가 이뤄진 건 1시간30분 정도. 권 변호사는 “기본적인 혐의 사실만 확인했는데 벌써 시간이 다 됐더라”고 했다. 변호사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아라이에게 한참 설명해줬지만, 그래도 경계를 풀지 않고 석 선장을 쏘지 않았다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권 변호사는 부산지방변호사회 이주민법률지원단장이다. 부산지방법원은 해적재판을 위해 국선변호인 희망자 신청을 받았다. 지원자가 많지 않아 변호사회에 추천을 부탁했고, 그래서 권 변호사가 국내 사법사상 최초로 해적 변호를 맡게 됐다. 지난달 31일 그가 속한 법무법인 부산(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대표변호사다) 사무실로 찾아갔다.

-해적을 변호하는 게 내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주위에서도 말이 많더라. 해적에게 무슨 인권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이어서, 좌파가 이젠 해적 편든다는 말도 들었다. 여론은 이미 재판의 결론을 내놓은 상태였고.”

-아라이는 어떤 사람이던가.

“직접 만나본 인상은…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어설프다고 해야 하나… 우리 해군이 진압하러 오리라곤 생각도 못한 것 같다. 납치만 하면 다 되는 일로 여겼다.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해놓고도 다시 몽골 배를 납치하려 시도했다. 13명 해적이 배 두 척 관리하기란 힘든 일인데 선원만 잡고 있으면 별일 없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해적재판은 세계 네 번째고 국내에선 처음인데.

“외국 판례는 도움이 안 됐다. 국내 형법이 적용되는 상황이어서. 재판 전에 아라이를 딱 두 번 만났다. 약 3시간씩 두 번. 처음엔 한국어-영어-소말리아어 순차통역을 하다가 동시통역으로 바꿨는데 이중통역 때문에 깊은 얘기는 불가능했다. 가끔 동문서답이 나왔다.”(소말리아어 통역사 한 명은 이 재판을 위해 호주에서 초빙했다. 부산지법은 하루 통역비로 약 100만원을 지불했다)

-다른 해적의 변호인들과 공동 작업을 한 건가.

“아니다. 국선변호인 5명이 각각 해적 1명씩 맡았다. 해적마다 혐의가 달라서 개별적으로 변론했다.”

권 변호사는 사건 기록부터 꼼꼼히 읽었다. 검찰이 아라이에게 적용한 혐의는 8가지다. 핵심 쟁점은 아라이가 석 선장에게 총을 쐈느냐였다. 검찰 측 증거로 제시된 갑판장 김두찬씨, 조리장 정상현씨의 진술은 모두 ‘아라이가 조타실에서 총을 갖고 다니는 것을 봤다. 그 뒤 총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라이가 석 선장에게 총 쏘는 것을 봤다는 진술은 없었다. 조타실에 감금돼 있던 선원 21명 중 두 사람을 제외하곤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다.

권 변호사는 “갑판장과 조리장은 아라이의 총소리가 ‘드르륵’ 하고 들렸다는데 석 선장 몸에 남은 총탄 흔적과 비교하면 과연 그렇게 쐈을지, 근거리에서 죽이려고 그렇게 여러 발 쐈다면 과연 석 선장 몸 상태가 지금과 같을 수 있는지, 청해부대원이 선박을 장악하고 석 선장을 구할 때 그렇게 총 맞은 석 선장이 ‘나 여기 있어요’ 할 수 있었을지, 뭔가 이상하다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와 아라이의 두 번째 면담은 4월 14일이었다.

“당신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당신이 석 선장을 쏘지 않았다는 말을 믿는다. 그러니 그때 조타실에서 벌어진 일을 사실대로 말해 달라.”

권 변호사가 이렇게 말하자, 첫 면담에서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던 아라이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라이는 그동안 부인했던 일부 혐의에 대해 진술을 바꿨다. 납치된 선원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선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권 변호사의 설득에 “보초를 섰다”고 시인했다.

이날 납치 등 다툼의 여지가 없는 혐의는 인정하되, 석 선장에 대한 총격과 인질을 인간방패로 삼았다는 혐의는 무죄를 주장한다는 그림이 그려졌다.

-변호 전략은 뭐였나.

“검찰의 공소사실 중 피고인별로 누가 뭘 했다고 행위가 특정된 건 몇 개 안 된다. 나머지는 사망한 해적과 살아남은 해적이 공모해 실행한 걸로 뭉뚱그려져 있다. 해군의 1차 구출작전 때 아라이가 군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부분. 아라이가 총을 쐈다고 특정돼 있지 않지만 공범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손으로 목을 그으며 죽이겠다고 협박한 부분 역시 공범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컸다. 반면 석 선장 총격과 인간방패 부분은 객관적 증거가 부족해 무죄를 예상했다.”

-석 선장에 대한 총격을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한다면 다른 해적이 쐈다는 건가.

“그건 모르겠다. 석 선장 몸에서 모두 6개의 파편이 나왔는데 2개는 우리 해군 것이다. 하나는 AK소총이고 나머지는 모른다. AK소총 총탄이 나온 거 보면 해적 중 누군가 직접이든 간접이든 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쐈는지, 검찰 기록을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너무 막연하지 않나.

“증거법이나 형사법 관점에서 볼 때 아라이가 석 선장을 쏜 범인으로 확신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란 얘기다.”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절차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재판 가운데 가장 공정하게 진행된 것 중 하나다. 재판부에는 불만 없다. 증거조사 단계에서 변호인이 참석하지 못했는데 검찰이 유리한 증거만 내놓은 것 같아서 그게 좀 아쉽다.”

-당연한 거 아닌가. 검찰이 공소 유지를 위해 유리한 증거만 내놓는 것은.

“맞다. 다만 이번 경우는 변호인에게 검찰이 조사한 기록 외에는 다른 자료가 전혀 없었다. 아라이가 총을 쏜 다음에 조타실 밑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선원들에게 겁주려고 조타실 천장에 총을 쐈다는 증언이 있었다. 검찰이 이를 아라이가 석 선장에게 총을 쐈다는 유력한 정황증거로 내세웠다가 스스로 철회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에서 이 자국은 계단이 아니라 외부에서 쏜 걸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찰 증거에 이런 식의 허점이 있었다. 검찰이 이왕 수사한 거 누가 쐈는지 끝까지 파헤쳤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권 변호사는 증거보다 상식에 근거해 재판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아라이가 석 선장에게 총을 쐈다는 시점은 청해부대 진압작전으로 배 위에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다른 인질은 놔두고 석 선장만 죽이려 했다는 것, 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도망가 총을 버리고 선실 안에 숨었다는 것,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결과적으로는 배심원과 재판부는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략의 미스다. 검찰 증거의 신빙성을 흔들면 배심원 판단이 달리 나오리라 봤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적극적으로 증거를 제시해 배심원을 설득했어야 했다. 항소심에선 감정의뢰, 사실조회를 해볼 생각이다. 총탄만 해도 석 선장 위치, 총탄 방향 등을 다시 감정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국민참여재판이었는데, 배심원 9명은 어떻게 선정됐나.

“배심원 후보들에게 재판부가 ‘그동안 언론 보도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몇 사람이 손을 들어서 재판부가 그들을 인터뷰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이미 유죄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판단돼 제외됐다.”

아라이는 무기징역이 선고된 뒤 매우 두려워하다가 부산구치소 교도관들에게 2심과 3심의 기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평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형이 확정되고 10년 이상 복역하면 가석방의 기회가 있다는 사실도 교도관들에게 들어 알고 있다. 이날 항소 의사를 확인하러 부산구치소로 찾아간 권 변호사를 그는 반기며 맞이했다.

-이번 재판으로 수임료는 얼마나 받나.

“상한선이 150만원이라고 들었다.”

-그 돈 받고 왜 이런 일을 맡았나.

“인정에 호소하고 선처를 요청할 거라면 이 재판을 맡지 않았을 거다. 법적으로 다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받아들였다. 한국은 피고인에게도 공정한 사법절차가 보장되는 나라다. 외국인이고 해적이라도 법에 명시된 인권은 보호돼야 하는 것 아닌가.”

부산=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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