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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남호철] 소통부재 정책의 운명

[데스크시각-남호철] 소통부재 정책의 운명 기사의 사진

이명박 정부 들어 ‘소통’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행정기관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다 무산되거나 연기된 몇몇 정책의 면면을 보면 소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 달 가까이 논란을 빚다 ‘없던 일’이 돼 버린 삼색신호등이 그 하나다. 지난 4월 20일 시범 설치되면서부터 줄곧 ‘혼란을 초래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글로벌 표준도 아닌데다 시민들의 불편도 이어졌다. 하지만 경찰청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바꿔 놓고 국민이 익숙해지면 된다’는 관료 중심적인 시각을 이어갔다.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사안을 전문가 몇몇이 둘러앉아 결정하고는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대로 강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상대로 교통사고도 잇따랐고 결국 한 달도 안 돼 폐기됐다. 시범 삼색신호등 11개를 설치하는 데만 6900만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나마 더 이상의 예산 낭비와 국민 불편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불편만 가중하는 정책을 위해 자칫 서울시만 850억여원, 전국적으로는 수천억원을 쏟아부을 뻔했다.

소통 부재는 ‘도로명 주소’에서도 나타났다.

도로명 위주의 주소 개편은 기존 지번(地番) 주소의 문제점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주소 체계는 1910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토지 및 임야조사사업을 벌였는데, 당시 지적제도가 도입되면서 토지의 일정한 구획을 표시한 지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렇게 생성된 주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행정동과 법정동이 맞지 않는데다 600번지 옆이 601번지가 아닌 1200번지가 되는 등 연속성 결여로 불편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특정 지점을 표시하기 어려워 위치와 경로 안내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반면 도로명 주소는 길 찾기가 쉽고, 물류비가 절감되며, 응급상황 발생 시 빠른 대처가 가능한 데다 국제적 주소체계 사용으로 국가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는 게 행정안전부의 설명이다. 행안부는 1997년부터 새 도로명 주소를 도입하기 위해 그동안 3692억원을 썼다. 오는 7월 말 새 주소를 최종 확정하고 내년 1월부터는 새 도로명 주소만 사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국민과 소통하지 못했다. 주민들의 혼란은 도외시됐다. 집배원들도 새 주소가 생소해 컴퓨터로 일일이 검색해 위치를 확인해야 할 정도다. 카드사와 택배업체들도 업무에 차질을 빚기는 마찬가지다. 이름이 지나치게 추상적인 데다 일부 주소는 어감이 좋지 않아 바꿔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도 끊이지 않았다. 불만을 토로한 민원이 579건이나 제기되고, 이 중 279건이 정식 절차를 거쳐 의견이 수용된 사실에 비춰보면 그동안 얼마나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글로벌 표준이라고 해도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오히려 혼란만 야기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안이하게 대처했다. 도로표지판 교체 등 하드웨어 정비에만 집중하느라 새 주소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실패했다.

삼색신호등의 학습효과였을까. 결국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새 도로명 주소의 전면 시행은 2년 연기됐다. 100년 가까이 사용한 지번 주소를 바꾸면서 기존 지번 주소와 새 도로명 주소를 함께 쓰는 기간을 5개월만 두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다.

연장된 준비기간 동안 주소 일괄변경 제도 등을 도입해 새 주소 도입에 따른 부담을 줄이는 등 다양한 방안을 보완해 혼란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뒤따르면 국민들의 호응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성급하게 도입해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시민 생활과 직결된 정책에는 소통이 우선돼야 한다. 전문가 판단이 합리적이더라도 설명과 설득이 필요하다. 이미 결정된 것을 위한 요식 절차가 아니라 정책 형성 단계에서부터 여론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남호철 사회2부장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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